꽃과 씨앗에서 포착해 낸 기쁨… 와인 한 방울에서 발견한 우주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박선민 ‘Pale Pink Universe’
伊 와이너리 성지에서 머물며 제작
와인을 매개로 인간·자연·시간 추적
포도 한 알에서 건져 올린 씨앗의 춤
작은 존재에 숨겨진 자연의 질서·비밀
사랑이란 관찰에 의해 예술로 태어나
보헤미아 출신의 작가 카렐 차페크(1890∼1938)는 ‘정원 가꾸는 사람의 열두 달’에서 정원사를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질서에 자신을 맞추어 기다리는 사람으로 그린다. 정원사의 시간은 뿌리가 흙에 안착하고 마른 줄기에서 기어이 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인내로 채워진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에서 출발하지만, 그는 우아한 관찰자라기보다 무릎을 꿇고 흙에 뒤덮여 작은 것들을 돌보는 존재다. 자연에 온몸을 내던지며 기후의 변덕을 견뎌낸 뒤, 마침내 고개를 든 한 떨기 꽃이나 새순에서 그는 우주를 발견한다.

◆응축된 세계
전시와 동명인 영상 ‘페일 핑크 유니버스(Pale Pink Universe)’는 와인 한 방울에서 시작한다. 액체 속 미세한 입자들은 보석이나 세포, 별빛을 닮은 모습으로 군무를 펼치거나, 서로를 끌어당기며 유영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멀어지자, 액체 방울들은 이내 행성처럼 자리하며 광활한 우주와도 같은 풍경을 그려낸다.
그 위에 납작하게 얹히는 꽃 드로잉들은 계속해서 인식을 뒤흔든다. 성의 건축 장식에서 추출된 형상들은 달팽이나 뱀, 혹은 이름 모를 바다 생물처럼 추상적인 파편으로 등장하다가 점점 익숙한 꽃의 모습으로 안착한다. 이러한 형상의 지연은 대상을 명명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관성적인 시선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생명의 근원적 지점에서는 종의 경계마저 이토록 유동적임을 시사한다.
꽃의 시간은 씨앗의 시간으로 역행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붉은 형상은 꽃이 영글어 낸 열매 같기도, 뜨겁게 맥동하는 심장의 모양 같기도 하다. 이윽고 확대된 포도 씨앗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시계의 초침이 된 씨앗. 꽃이 수분(受粉)이라는 목적을 위해 피어난 찬란한 수사라면, 씨앗은 그 모든 열망이 성취되어 다음 생을 기다리는 거대한 시공간의 결정(結晶)이다.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선회하는 씨앗의 움직임은 시간의 춤이 되어, 그 안에 새겨진 아득한 세월과 토양의 기억을 불러낸다.

씨앗의 시간이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박선민의 작업 역시 물성의 변성을 거치며 서로가 서로의 씨앗이 된다. 함께 전시되는 드로잉과 조형물들은 영상 속 형상들이 각기 다른 물성을 입고 발현된 존재들이다. 프레스코 벽화의 먼지 속 멈춰 있던 꽃은 드로잉으로 소생하고, 조각으로 이어지며,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다.
브론즈 조각은 작가가 현지에 머물며 써 내려 간 시 ‘22송이 꽃다발’에서 출발한다. ‘꽃’이라는 단어가 22번 등장하는 이 ‘텍스트 꽃다발’은 “꽃이 핀다”라는 문장에서 시작해, 꽃을 보고, 곁에 두고, 그리고, 그 그림을 조각으로 만들고, 그 조각 꽃의 그림자를 보다 마침내 자신이 꽃이 되어 버리는 과정을 담는다.
대상을 오래 바라보다 끝내 자신이 대상이 되어버리는 상태. 작가는 이에 대해 ‘그것은 내 안에 깊이 넣고 나는 저 멀리 둔다’고 말한다. 대상이 자신의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올 때, 비로소 자아에서 벗어나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볼 객관의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는 역설이다.

무언가를 오래, 그리고 깊이 관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사랑이자 경의이지만, 박선민의 작업에서 사랑은 대상을 지독하게 내면화한 뒤 자신을 먼 곳으로 보내는 ‘관계의 미학’에 가깝다. 와인 한 방울에서 발견한 우주와 포도 한 알에서 건져 올린 씨앗의 춤, 꽃 한 송이에서 감지한 인간의 열망은 모두 자아를 비워낸 시선의 끝에서 드러난다.
작가가 머문 카스텔 ‘지오콘도’가 ‘기쁨’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와인은 인간이 자연의 지혜를 빌리고 자연적 질서에 동화되어 얻어낸 기쁨이다. 그 기쁨은 아름다움을 향한 찬미에서 비롯된다. 박선민의 작업에서도 기쁨은 어떠한 결괏값이라기보다 세계를 수용하고 몰입하는 태도 속에 자리한다.
작은 존재 속에 숨겨진 자연의 질서는 사랑이라는 관찰을 통해 드러나고, 그 드러남은 예술이 된다. 박선민의 작업은 세상의 크고 작은 리듬에 자신의 감각을 기민하게 맞추어가는 조응의 과정이자, 거대한 자연 속 존재의 비의(秘義)를 노래하는 시적 응시의 기록이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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