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인물열전]꽃의 시인 김춘수
한 편의 시가 한 시인을 영원히 기억하게 한다면, 통영이 낳은 시인 김춘수(1922~2004)에게 그 시는 단연 '꽃'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발표된 '꽃'은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비로소 상대방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깨달음을 담은 작품이다. 국어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리는 한국 현대시의 대표작으로, 발표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변함없이 새겨지고 있다.
감정을 노래하는 대신 사물의 본질을 파고든 그의 시 세계는 한국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평생 순수 문학을 고집하던 시인은 군사정권 시절 정치에 발을 들였고, 그 선택은 평생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아온 거장의 생애, 그 빛과 그늘을 함께 돌아본다.

◇통영 바다와 김춘수
김춘수는 1922년 통영 여황산 자락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훗날 그는 에세이 '왜 나는 시인인가'에서 탱자나무 울타리와 붉은 벽돌집, 바다의 노을 같은 고향 풍경을 거듭 떠올리며 그것이 자신의 시적 감수성을 키운 뿌리였다고 고백했다. 통영이 김춘수를 비롯해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같은 거장들을 잇달아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 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중앙의 인재와 세련된 문화가 수백 년간 스며들었다. 여기에 경제적 여유를 쌓은 어장주들이 자녀를 유학 보내 세계 문물을 흡수하게 했다. 이런 두터운 문화적 토대가 걸출한 예술가들을 길러낸 밑거름이 됐다.
김춘수 역시 통영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유학길에 올라 일본의 예술대학에서 유학하며 문학적 지평을 넓혔다.
하지만 그 시절 시련도 함께 찾아왔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반일 사상 혐의로 7개월간 수감된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자유롭게 불릴 수 없는 공포를 경험했다. 이때의 고립과 공포는 훗날 그가 '이름'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시인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방 후 귀향한 그는 유치환, 윤이상, 전혁림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지역 예술 부흥을 이끌었다. 특히 화가 전혁림과의 교류는 각별한 예술적 동행으로 평가받는다.
김춘수 유품전시관 관계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생전 "친구야, 니는 글을 적으면 나는 그림을 그릴 테니 맞춰서 하자"는 약속을 일상처럼 나눴다고 한다.
그 우정의 결실로 탄생한 첫 시집 '구름과 장미'는 문학과 미술이 어우러진 통영 예술의 상징적 결과물로 남아 있다.
김춘수는 교단에서 후학을 길러내는 데도 힘썼다. 마산중학교 교사 시절 훗날 '귀천' 등의 시를 남긴 천상병 시인을 발굴했고, 경북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52년에는 대구에서 시 비평지 '시와 시론'을 창간했으며, 이 무렵 '꽃'을 발표하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꽃'은 발표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째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손꼽힌다. 교과서 속 활자로만 머물지 않고 노래와 그림,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세대를 넘어 읽히고 있다.
강희근 경상국립대 명예교수는 "김춘수 시인은 1960~1970년대 한국 시단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거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생전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1위에 오를 만큼 문단의 큰 사랑을 받았다. 화려한 수식 대신 가장 솔직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 시인, 그것이 김춘수였다.

◇저항과 타협 사이
시인의 삶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60년 마산에서 3·15 의거가 일어났을 때, 김춘수는 총탄이 날아드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분노에 찬 심정으로 발표한 시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는 의거 당시 희생된 소년들의 핏방울을 베고니아 꽃잎에 빗대어 선연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시위 현장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강 명예교수는 "당시 김춘수 시인이 발표한 이 시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 이후 촉발된 2차 봉기 주도자들에게 결정적인 힘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빼어난 문학사적 업적 뒤에는 여전히 논란으로 남은 행적도 있다.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에 선출되고 정권을 찬양하는 시를 쓴 행보다. 1960년 저항의 시를 썼던 그 시인이 권력의 편에 선 것으로, 두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문학과 권력, 저항과 타협이 한 시인의 생애 안에 복잡하게 뒤엉킨 것은 비단 김춘수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을 언어로 붙잡으려 했던 시인이 그 언어를 권력의 도구로 내어줬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강 명예교수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시기를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는 시인이지만, 그의 공과는 모두 솔직하게 기록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 통영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꽃'의 시인을 기억해 왔다. 남망산공원에 세워진 '시비(詩碑)'는 초등학생부터 어부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이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태 건립됐다. 시비 뒷면 동판에는 참여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시인이 시대의 풍파 속에 모순된 발자취를 남겼을 때에도, 고향 사람들은 그의 시가 지닌 가치만큼은 변함없이 간직했다.

◇채워지지 않는 공간
1999년, 50여 년을 함께한 아내 명숙경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먼저 떠난 아내를 애도하는 시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시집 '달개비꽃'에는 사별한 아내를 향한 노시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평생을 달려온 거장이 생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것은, 결국 가장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사랑과 상실이었다.
2004년 시인이 별세한 뒤 유족들은 그의 손때 묻은 유품들을 고향 통영시에 기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08년 봉평동에 문을 연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통영항 바다와 지척에 자리하고 있다. 한려수도해상국립공원 사무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이곳은 2009년 한 차례 확장 이전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그런데 다른 거장들의 기념관과 달리, 이곳은 여전히 '유품전시관'이라는 임시 간판을 내걸고 있다. 통영시가 시인의 동호동 생가를 매입해 정식 기념관을 건립하려던 계획이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무산되면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경리 기념관, 윤이상 기념공원 등과 비교할 때, 언제쯤 그의 이름을 온전히 담을 공간이 마련될지, 아직은 기약이 없다.
그럼에도 유품전시관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이어지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고인의 고뇌가 서린 육필 원고와 평생의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2층에는 생전의 서재와 침실이 그대로 재현돼 방문객을 맞는다. 시인의 중절모와 바바리코트, 빛바랜 사전 귀퉁이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메모들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시인의 평생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임명진기자·취재 도움=통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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