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말하지 않은 게 아니다
지난 4월 발의된 한예종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이전 관련 법안이 논란이 됐다. 이 이슈는 지역소멸 위기와 코앞으로 다가온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감케 한다. 이재명 정부는 ‘5극3특’ 국가균형발전 전략 아래 지역통합을 추진하고, 지역의 산업 기반을 육성해 청년 일자리를 만들려는 정책들이 제안된다. 한예종 이전 법안도 “지역 청년 예술인들의 수도권 유출로 인해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가 위축되”는 현실을 제안 이유로 든다.
지역 청년 일자리 확대의 목적은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도록 해 지역 인구 감소를 막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역소멸론의 핵심 전제가 ‘아이를 낳아줄’ 청년 여성이 지역을 떠난다는 인식에 있음을 알려준다. 지역소멸지수는 지역 거주 가임기 여성의 인구수로 측정된다. 그 관점은 정확히 10년 전 발표돼 논란이 된 ‘가임기 여성 지도’로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청년 유출’은 ‘가임기 여성 유출’이고, ‘인구 관리’는 출산의 당사자인 청년 여성의 몸과 미래를 통제한다.
그런데 한예종 이전 제안이 학교 구성원이나 문화계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추진된 것처럼, 인구 관리라는 ‘위로부터의 접근’에는 정책을 삶으로 살아갈 당사자들의 의견이 누락된다.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결정 과정에도 지방선거에서도 지역 청년 여성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역을 일상의 무대로 살아가는 청년 여성은 무슨 경험을 하며 무슨 문제를 호소하고, 또 살고 있는 지역을 어떤 모습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일까?
많은 전문가가 공적인 목소리를 낼 만한 지역 청년 여성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말로 사람이 없을까? 지역 여성들은 말하지 않는 것일까? 오히려 듣고 싶은 말 이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게 진실일 것이다. 지난 어린이날 광주 한 여고생이 거리에서 살해된 사건에 관한 사회의 무관심에, 광주 경신여고 교지편집부 매향은 이렇게 호소했다. “한 소녀의 꿈과 생명이 무참히 짓밟혔는데, 세상은 너무나 조용합니다.” 침묵한 것은 지역 여성이 아니라 사회였다.
침묵은 이중으로 작용한다. 5·17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를 앞둔 시점에 발생한 비면식범의 여성 대상 폭력은 지난 10년간 여성들이 일상의 안전을 요구했던 목소리가 지워진 채 그저 가임기의 몸으로 취급됐던 사실을 참담하게 깨우쳐준다. 동시에 그간 지역에서 일어난 숱한 ‘강남역 사건’들이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서울과 비서울 간의 격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건이 이슈화되자 곧바로 나타나는 지역 혐오는 지역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이중의 침묵이 얼마나 공고하고 교묘하게 작용하는지 알려준다. 정작 서울에서 발생한 강력범죄들이 수없이 보도됐지만 ‘서울 혐오’란 말은 없다.
그럼에도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건, 이중의 침묵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 지역 여성들, 이를 외면하지 않는 목격자 덕분이다. “살려달라”는 “비명소리에 그냥 몸이 움직였다”며 피해자를 구하려던 남고생이 있었다. 그는 수차례 흉기에 가격당한 상태에서도 지인에게 연락해 사람이 칼에 찔렸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사회의 무관심을 뚫고 사건을 이슈화한 것은 “우리 곁에 항상 있던 바로 ‘우리’ 중 한 명”(설월여고 학생회)을 기억하겠다는 광주 학생들의 절박한 목소리다.
약 100년 전인 1929년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학생 세 사람을 성희롱했다. 이를 목격한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했고, 이 사건은 11월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전국적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피해자들도 식민주의와 젠더라는 이중의 차별에 맞서 함께 싸웠다.
지역 여성들은 계속 말하고 있다. 침묵도 연대도, 그 책임은 목소리를 듣는 쪽의 것이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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