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직함 이용하는 장돌뱅이들과는 격이 달랐죠

한겨레 2026. 5. 1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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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강정인 서강대 정외과 교수 1주기
강정인 교수가 2007년 7윌20일 제자들과 양평 용문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상복 교수 제공

1987년 가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간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정치사상 관련 수업으로 기억한다. 6월 항쟁으로 열린 민주화의 자리에서 교수와 학생들은 김대중과 김영삼 가운데 당위론적으로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하는가, 현실적으로는 누가 후보가 될 수 있을까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대학은 그렇게 정치적 실험장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89년 봄, 대학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의 공간이었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새로운 분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마르크스만을 외치던 학생들이 낯선 프랑스 사상가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의 생소함은 곧 캠퍼스 변화를 알리는 상징적 징후였다.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젊은 교수가 부임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싹튼 반정부 투쟁인 ‘68운동’의 기운을 선구적으로 끌어안은 진보의 도시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공부한 강정인(1954~2025·사진) 선생님이었다.

90년대 정치사상 연구 새 흐름 주도
‘서구 중심성’ 문제 본격 제기하며
자기 도전의 길도 정면으로 마주해

선생님은 1954년 겨울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법학에서 정치학으로의 이동은 1994년에 펴낸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란 책의 후기에서 밝히셨듯이, 1970년대의 권위주의를 인내해야 했던 청년의 시대적 고민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유신 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이른 죽음을 맞게 된 대학 동기 이범영(1955~1994) 열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뜻하지 않은 벗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 책을 그에게 바친다”고 적었다. 선생님의 죽음을 바라보는 후학들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다.

1989년 봄 학기 선생님의 첫 수업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한국 사회에 민주화를 가져다준 ’6월 혁명’과 이후 대통령 직접 선거가 치러지던 1987년의 강의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정치적 실천이 아니라 정치사상 앞에서 모두는 긴장하고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언제나 차분했다. 목소리의 파장은 강렬하지 않았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의 에너지는 다른 곳을 향했다. 공부할 텍스트의 단어와 문장의 정확함을 판별하는 작업에, 학생들의 과제에 대한 지독히 꼼꼼하고 엄격한 수정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좌파이자 감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학생이 2016년 한 블로그에 남긴 글에는 교육자·연구자로서 선생님의 모습에 대한 솔직하면서 정확한 평가가 담겨 있다. “내가 본 강정인 교수님은 가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실 때도 있고, 꼰대 같은 면모도 있지만 대화가 통하는 합리적인 선생님이다. (중략) 학교에서 만난 어떤 교수보다도 교수의 본분(연구와 강의)에 충실했다. 정치적으로 치우침을 드러내지 않은, 정치학자의 모습에 가장 부합하는 분, 정치하려고, 유명인이 되려고 교수라는 직함을 이용하는 어떤 장돌뱅이들과는 격이 다른 분(이다).”

대부분의 인간처럼, 선생님 또한 인간으로서 한계와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학자로서 교수로서 선생님은 위 평가처럼 사고와 판단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직분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직업을 소명으로 인식한 지식인이었다.

지난 2일 동료·제자들 모여 추모식
“가르치고 공부하는 삶으로 충만
사고·판단 균형 잃지 않으려 노력
정치학자 모습에 가장 부합했던 분”

1980년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는 좌파 정치사상 연구에 대한 지적 자부심으로 넘쳐난 곳이었다. 1990년대를 이끌어간 강정인 선생님은 그 전통에 도전했고 그 결과 정치사상 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선생님의 연구는 고대·근대·현대를 넘나들었고, 가장 고전적인 주제에서부터 가장 첨단의 주제를 아울렀다. 그런 만큼 학생들의 지적 관심은 폭넓었고 상상력의 지평 또한 확장되었다. 이른바 ‘변혁의 시대’를 지나 1990년대로 진입한 한국 사회는 그처럼 다양한 지성을 요구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선생님은 그런 사회적 요청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강정인 교수. 사진 하상복 교수 제공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2004)는 선생님의 연구 역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연구 정체성을 기록한 한 글에서 선생님은 ‘탈 서구중심주의’, ‘탈 서구중심주의적으로 접근한 한국 현대 정치사상의 해석’을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했다. 선생님은 한국의 정치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적이 없는 문제, ‘누구라도 인식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로 머물러 있던 ‘학문의 서구 중심성’이란 문제를 본격적인 논쟁의 무대로 올려놓았다. 그 지적 파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는 자신의 지적 선택과 결정에 대한 불가피한 반성이라는 일종의 부메랑 같은 것이었지만, 선생님은 그런 자기 도전의 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했다.

강정인 교수. 사진 하상복 교수 제공

사고로 크게 다치신 선생님은 건강한 복귀를 바라던 우리의 바람을 멀리하고 지난해 5월3일 세상을 떠나셨다. 1주기를 앞둔 지난 2일 오후 서강대에선 선생님을 기억하는 동료와 제자들이 모여 조촐한 추모식과 추모 세미나를 열었다. 우리는 여전히 선생님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삶으로 충만한 분으로 기억한다.

하상복/목포대 교수, 사진 하상복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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