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조선왕과 16세 영국여왕… "꼭 왕이 돼야 하나요"
수양대군은 조카 양위 받아내고 세조 즉위
노설범랜드 공작은 며느리 내세워 권력욕
새남터에서 거열형 당한 사육신과 신숙주
제인 편들던 추밀원, 하룻만에 메리 지지로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 어떻게 기록될지
둘의 진실 조금 더 빨리 정리될 수 있었다면...
570년의 시간을 넘어 겹쳐 보이는 두 얼굴, 그리고 2026년 봄의 대한민국
역사란 어떤 점에서 참으로 효율적이다. 같은 이야기를 굳이 나라를 바꾸고 언어를 바꿔가며 반복해서 들려준다. 마치 이해 못한 학생에게 다시 설명해주는 선생님처럼. 문제는 인류가 570년이 지나도록 그 수업을 진정 이해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린 군주, 사라진 보호자
1452년 5월, 문종(1414~1452)이 재위 2년 만에 등창으로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것은 열두 살짜리 아들과, "이 아이를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뿐이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1418~1441)는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산욕열로 죽었다. 할아버지 세종(1397~1450)도 이미 없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열두 살 왕. 눈물을 흘리며 누나 경혜공주에게 "누님, 제가 꼭 왕이 되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물음의 답을 준 것은 숙부 수양대군(1417~1468)의 철퇴였다.

실권자의 딜레마, 왜 직접 왕이 되지 않았나?
여기에서 두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난다.
수양대군은 직접 왕이 됐다. 가능했다. 그는 세종의 둘째아들, 문종의 친동생이었다. 왕실의 피가 흘렀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켜 좌의정 김종서(1383~1453)를 철퇴로 격살하고, 영의정 황보인(?~1453) 등 수십 명을 죽였다. 책사 한명회(1415~1487)가 살생부를 들고 입궐하는 대신들에게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2년 뒤인 1455년, 조카를 압박해 양위를 받아내고 세조로 즉위했다.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절차는 밟았다.
반면 노섬벌랜드 공작은 직접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헨리 7세의 피와 아무 관련이 없는 신흥 귀족이었다. 왕실 혈통 없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당시 잉글랜드에서 법적으로도 귀족사회의 논리로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왕실 혈통을 가진 제인을 내세우고, 자기 아들 길퍼드 더들리(1535~1554)와 결혼시켜 외척이 되려 했다. 그런데 제인은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주기를 거부했다. 열여섯 살 소녀가 권력자의 계획 한 가지를 막아낸 것이다. 그 대가는 처형이었다.

충신과 배신자, 사육신과 신숙주
단종 사건엔 두 종류의 신하가 있었다. 복위를 꿈꾸다 새남터에서 거열형을 당한 성삼문(1418~1456), 박팽년(1417~1456), 하위지(1412~1456), 이개(1417~1456), 유성원(?~1456), 유응부(?~1456), 이들이 사육신이다. 죽어서 의리를 지킨 여섯 신하. 반대편엔 신숙주(1417~1475)가 있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기로 했으나 수양대군 편에 섰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쉽게 쉬어 버리는 음식에 붙어 있다. 숙주나물. 변절의 상징이 식탁에까지 올라온 셈이다.

죽음의 방식, 직접과 간접
수양대군은 처음엔 조카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금성대군(?~1457)이 순흥에서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명분이 생겼다. 1457년 10월, 단종은 열일곱 살에 사약을 받았다. 실록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쓴다. 누가 믿겠는가. 하여간 단종을 죽인 세조는 이후 피부병과 악몽에 시달렸다고 전한다.
메리 1세도 처음엔 제인을 살리려 했다. 꼭두각시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헨리 그레이가 1554년 1월 반란에 또 가담했다. 딸의 목숨이 저당 잡힌 상황에도 정치게임을 멈추지 않은 아버지. 결국 1554년 2월 12일, 제인은 참수됐다. 열여섯 살이었다. 길퍼드 더들리도 같은 날. 헨리 그레이는 11일 뒤. 노섬벌랜드는 이전해인 1553년 8월에 처형됐다.
제인을 죽인 메리 1세는 "내 가슴을 가르면 '칼레(Calais)'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1558년 죽었다. '칼레'는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다. 잉글랜드가 백년전쟁 중인 1347년에 점령한 뒤 200년 넘게 지배해온 프랑스 본토 내 마지막 잉글랜드 영토였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 관세수입의 3분의 1을 책임질 만큼 경제적으로도 중요했고, 잉글랜드인들에게는 국가적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메리 1세가 사랑에 눈이 멀어 남편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1527~1598)의 요구에 응해 아무 이득 없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1558년 프랑스가 칼레를 점령하면서 잉글랜드는 백년전쟁 이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프랑스 본토 영토를 잃었다.
임종 직전 메리는 "펠리페… 칼레… 펠리페… 칼레…"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죽었고, "내 심장에 칼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기억되는 방법, 장릉과 런던탑
한편 단종은 죽고 나서 오랫동안 죄인이었다. 1698년(숙종 24년)이 되어서야 복위가 결정됐다. 사후 241년. 지금도 강원도 영월 장릉에는 해마다 제사가 열리고,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 억울함은 단종의 이름에 실려 500년 넘게 전해진다.

2026년 봄 이후의 한국에게
두 사건이 한국의 현재에 던지는 물음은 날카롭다.
첫째, 어린 단종과 제인 그레이를 짓밟은 자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을 했다. 계유정난의 명분은 "역모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노섬벌랜드는 "가톨릭의 위협에서 신교를 지킨다"고 했다. 권력 찬탈의 명분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그것이 진짜 명분인지 가짜 명분인지를 가리는 일, 그것이 민주주의 시민의 일상 업무다.
둘째, 한명회(1415~1487)는 일흔세 살까지 살았다. 정치적으로 총명했고, 두 왕의 장인이 됐으며, 압구정에서 풍류를 즐겼다. 노섬벌랜드는 그해 죽었지만, 그의 아들 로버트 더들리(1532~1588)는 훗날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 옆에서 살았다. 권력을 위해 도덕을 판 자들이 잘 사는 구조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제도로 막아야 한다. 개인의 양심에만 맡겨두면 숙주나물은 계속 자란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 단종과 제인은 자기 뜻과 무관하게 끌려 다니다 죽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기억한다는 사실자체가 작은 정의다. 당대의 권력자들은 실록에 "스스로 죽었다"고 썼지만, 역사는 결국 진실에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다. 숙종도, 영국의 역사가들도, 그 진실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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