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워치] 세계 경제 목줄 쥔 해협들…"다시 돌아온 지정학의 시대"

최재성 기자 2026. 5. 1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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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위기 계기로 말라카·대만해협 경계감 확산
해상 초크포인트, 물류 통로 넘어 지정학 압박 수단 부상
드론·미사일·비국가 무장세력까지 가세…공급망 리스크 구조화
호르무즈 해협 폐쇄 후 이라크 터미널에 정박 중인 유조선 [출처=연합]

호르무즈해협 위기를 계기로 세계 주요 해상 요충지에 대한 경계감이 다시 커지고 있다. 과거 해협은 원유와 상품이 오가는 물류 통로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국가 간 힘겨루기와 비국가 무장세력이 결합한 지정학적 압박 수단으로 변하고 있다.

국제안보 전문가들은 호르무즈해협뿐 아니라 말라카해협, 대만해협, 바브엘만데브해협 등 주요 협수로가 세계 경제의 약한 고리로 부상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 공급망이 촘촘하게 연결될수록 일부 해상 병목지대의 불안이 에너지 가격, 물류비, 물가, 기업 생산 차질로 곧장 확산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논란이 된 말라카해협 통행료 발언은 이 같은 우려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4월 인도네시아의 푸르바야 유드히 사데와 재무장관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말라카해협에 통행료를 부과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가 수익을 나눌 경우 "상당한 수입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논란이 커지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항행의 자유를 지지하며 통행료 부과 계획은 없다고 진화했다.

말라카해협은 동아시아와 중동·유럽을 연결하는 핵심 해상 교역로다. 로이터에 따르면 2025년 이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10만2500척을 넘었고, 전 세계 해상 원유 흐름의 29%가 이곳을 거친 것으로 집계됐다. 호르무즈해협보다 더 많은 원유가 지나가는 세계 최대급 해상 초크포인트라는 의미다.

◆ 다시 돌아온 '지정학의 시대'

인도네시아 장관의 발언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국제사회에는 더 큰 질문을 남겼다. 주요 해협을 둘러싼 통제권 논리가 다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협이 단순한 지리적 통로가 아니라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렛대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호르무즈해협이 대표적이다. 중동 정세가 흔들릴 때마다 국제유가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최근에도 미국과 이란 간 긴장이 이어지면서 호르무즈 통항 차질 우려가 커졌고, 국제유가와 금융시장은 지정학 리스크를 다시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위험이 호르무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라카해협은 중국과 동아시아의 에너지·무역 생명선이다. 대만해협은 반도체 공급망과 미중 전략경쟁의 핵심 공간이다. 바브엘만데브해협은 홍해와 수에즈운하를 잇는 통로로, 유럽과 아시아 물류의 비용 구조를 좌우한다.

해협의 전략적 가치는 세 가지 조건에 따라 커진다. 첫째, 통과 물동량이 많아야 한다. 둘째, 우회 항로가 비싸거나 오래 걸려야 한다. 셋째, 주변 정세가 불안정해야 한다. 이 조건이 겹치는 곳일수록 해협은 경제 통로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무기가 된다.

◆ 해협 노리는 비국가 무장세력

최근 초크포인트 리스크가 더 복잡해진 이유는 위협 주체가 국가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은 비국가 무장세력도 세계 무역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후티 공격 이후 상당수 선사는 수에즈운하 대신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하는 항로를 택했다. 이로 인해 운항 기간은 길어지고 연료비와 보험료, 컨테이너 운임은 상승했다. 자연과학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실린 연구도 2023~2025년 홍해 공격으로 선박 우회와 운임 상승, 일부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과거 해협 봉쇄는 대규모 해군력의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소형 고속정, 지대함 미사일, 드론, 기뢰, 사이버 공격만으로도 통항을 위협할 수 있다. 이는 해상 안보 비용을 구조적으로 높인다. 군함이 직접 봉쇄하지 않아도 보험료가 오르고, 선사가 위험 항로를 피하면 경제적 효과는 사실상 봉쇄와 비슷해진다.

국제법상 주요 국제해협에는 항행의 자유 원칙이 적용된다. 유엔해양법협약은 국제 통항에 사용되는 해협에서 선박과 항공기의 통과 통항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국제법은 관련 국가와 행위자들이 이를 지킬 의지가 있을 때 실효성을 갖는다. 해협의 위기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 호르무즈 위기, 일시적 변수 아닌 구조적 리스크

호르무즈해협 위기는 이제 특정 지역 분쟁의 부수 효과로만 볼 수 없다. 세계 경제가 소수 해상 병목지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에 가깝다.
나사(NASA)의 테라 위성으로 촬영된 호르무즈 해협. [출처=NASA]

현대 공급망은 '적시 생산' 체계에 기반한다. 기업들은 재고를 최소화하고 필요한 부품과 원자재를 제때 공급받는 방식으로 비용을 낮춰왔다. 평상시에는 효율적이지만, 해협 하나가 막히면 충격은 빠르게 확산된다. 원유와 LNG 가격이 오르고, 해상운임이 뛰며, 제조업 납기와 소비자 물가가 동시에 흔들린다.

이 때문에 해협 리스크는 에너지 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식품, 비료, 석유화학, 전력 인프라까지 광범위한 산업에 영향을 준다. 특히 한국처럼 수출입 의존도가 높고 에너지 대부분을 해상 운송에 의존하는 국가는 주요 해협 불안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결국 호르무즈 위기는 세계 경제에 하나의 신호를 보냈다. 세계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의 길목을 누가 통제하느냐가 다시 중요해진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해협은 더 이상 지도 위의 좁은 물길이 아니다. 그것은 원유 가격을 흔들고, 선박 운임을 바꾸며, 국가 경제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지정학의 목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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