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만 쫓는 사후처방 정치

정치의 본래 역할은 단순한 사후 대응에 머무르지 않는다. 국가는 미래를 예측하고 필요한 기반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산업 구조 변화에 대비하고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맞는 노동시장과 복지 체계를 설계하며 교육과 기술 혁신을 통해 다음 세대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재편, 지역 불균형과 청년 유출, 디지털 전환과 AI 경쟁 같은 과제 역시 장기적 안목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정치란 결국 공동체의 내일을 기획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정치는 장기 전략보다 당장의 이슈를 따라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슈 중심 정치는 구조개혁을 밀어낸다. 정치권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해관계 충돌이 큰 개혁 과제보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 정책에 끌리기 쉽다. 노동시장 개편, 연금·의료 개혁, 지방 균형발전, 교육 혁신처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과제는 늘 뒤로 밀린다. 대신 당장 눈에 띄는 가격 문제나 특정 사건, 갈등 이슈가 정치의 중심을 차지한다. 정치가 미래를 설계하기보다 현재의 불만을 관리하는 산업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이런 모습은 반복된다. 최근 한국 경제는 반도체 수출 회복에 힘입어 일부 지표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의 호황이 경제 전체의 건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고 자영업자는 높은 임대료와 인건비, 낮은 소비 사이에서 버티고 있다. 중소기업은 인력난과 생산성 정체에 시달리고 지방 산업은 활력을 잃고 있다. 청년층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중장년층은 조기 퇴직 이후 불안정 노동시장으로 밀려난다. 잠재성장률은 계속 낮아지고 있는데도 정치와 언론은 눈앞의 호재 하나에 기대어 구조적 위기를 외면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국가 경쟁력 기반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기업이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효율적인 물류망, 혁신을 촉진하는 금융 시스템, 유연하면서도 안전한 노동시장, 경쟁력 있는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민의 경제활동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야말로 국가 성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성과가 늦게 나타나고 정치적 보상이 작다는 이유로 늘 후순위로 밀린다. 도로와 항만, 전력망 같은 전통적 인프라뿐 아니라 데이터센터, 첨단 연구개발 생태계, 지역 대학 경쟁력 강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
정치가 설계 기능을 잃으면 사회 전체는 점점 단기적 판단에 갇히게 된다. 기업은 미래 예측이 어려워 투자를 미루고 청년은 전망이 보이지 않아 도전을 포기한다. 가계는 소비보다 생존을 우선하게 되고 국가는 성장 동력을 잃는다. 결국 문제는 하나씩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현안 브리핑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청사진이다.
오늘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만으로 내일의 번영이 오지 않는다. 물가와 집값, 경기 대응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전부가 되는 것은 안 된다.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과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정치는 결국 위기가 닥친 뒤에만 움직이게 된다. 국정이 사건 대응의 연속이 돼서는 국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치는 원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제는 반응하는 정치를 넘어 설계하는 정치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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