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 자리한 히로시마 항구 마을 ‘오노미치’, 술의 고장 ‘히가시히로시마’ 평화의 도시를 염원하는 히로시마 여행
히로시마현은 일본 혼슈 서남부 세토 내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히로시마가 이곳의 현청 소재지이자 최대 도시다. 오늘날 평화의 도시를 염원하는 히로시마를 시작으로 신사의 섬으로 유명한 이쓰쿠시마 섬, 유서 깊은 항구 마을인 오노미치, 술의 고장인 히가시히로시마까지. 아름다운 세토 내해의 풍경과 더불어 평화와 전통의 공존을 상징하는 히로시마현 여행을 떠나보자.
옛 정취가 느껴지는 히로시마현 오노미치 혼도리 상점가 풍경
비극을 넘어선 희망...히로시마 원자폭탄의 비극 그리고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 도심 풍경
원자폭탄이 불러온 비극과 참상은 오늘날 히로시마를 ‘평화의 도시’로 일으켜 세웠다. 모토야스강을 따라 위치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 그 중심을 이룬다. 12만 제곱미터가 넘는 넓은 공원은 폭탄 투하 이전 히로시마의 정치적 및 상업적 중심지였다.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이곳 일대는 재개발되지 않고 평화 기념 시설로 조성되어 현재에 이른다.
사실 히로시마 여행을 계획한 이유 중 하나는 이 공원에 자리한 원폭 돔을 실제 두 눈으로 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원폭 돔은 본래 1915년에 건설된 히로시마의 산업 홍보 전시관으로, 원자폭탄 투하 당시 무너지지 않고 뼈대만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였다.
히로시마 도심을 가로지르는 모토야스강 풍경
원폭 피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폭격 후 그대로 보존되어 국가와 인류가 공동으로 겪은 재앙의 유산을 기리는 유적지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원폭 돔은 절대 잊혀서는 안 되는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간 비참한 전쟁과 원자폭탄의 참상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다.
평화기념공원 중앙 부근 22만 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아치형 추모비를 살피고 동쪽으로 이동해 희생자 추도평화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 내부에는 희생자 추도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원폭희생자를 추도하며 나직이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이곳 공간에서 원폭 돔을 실제로 본 먹먹함을 넘어선 어떠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좌로부터 시계방향)원자폭탄의 비극과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원폭 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원폭희생자 위령비, 1945년 말까지 희생된 사망자수 14만 명에 맞춰 14만 장의 타일을 14만장의 타일을 사용해 파노라마로 디자인된 추도 공간, 원폭 돔 전경
추도 공간 벽면에는 당시 폭심지였던 구 시마병원에서 본 피폭 후의 거리 모습을 1945년 말까지 희생된 사망자수 14만 명에 맞춰 14만 장의 타일을 사용해 파노라마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천장을 떠받치는 12개의 기둥은 과거의 참상과 오늘날의 일상을 연결하고, 이를 통해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추도하며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바람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핵무기와 전쟁이 없는 안전한 세상을 이룩하는 길, 평화의 도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픔과 슬픔 그 안에서 한줄기 작은 빛을 뿜어내는 희망의 소리로 강렬한 울림을 선사했다.
사슴과 신사의 섬_이쓰쿠시마 섬 물 위에 떠 있는 도리이…일본 3대 절경
음식점과 카페, 상점이 줄지어 들어선 오모테산도 상점가 풍경과 명물로 꼽히는 굴 구이
히로시마 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섬, 이쓰쿠시마 섬은 히로시마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목적지 중 하나다. 세토 내해 히로시마만 남서부에 위치한 섬과 본토를 잇는 미야지마 페리를 타면 15분 만에 이동이 가능해 히로시마에서 반나절 당일치기 여행으로 방문하기 더없이 훌륭한 장소다.
이쓰쿠시마 섬은 공식명칭 대신 일본어로 ‘신사의 섬’을 뜻하는 미야지마(宮島)라고 더 많이 불린다. 작은 만에 자리한 신사 단지는 기도실과 본당, 회랑 등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만 주변에 산책 길이 조성되어 있어 방문객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좌로부터)일본 3대 절경으로 꼽히는 바닷물 위에 떠 있는 도리이, 헤이안 시대 말기에 건립된 이쓰쿠시마 신사
만조 때는 도리이(신사 입구에 세우는 기둥 문)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관을 연출하는데 이 풍경은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로 꼽힌다. 이쓰쿠시마 신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일본 정부의 국보 중 하나로도 지정되어 있다.
야생 사슴이 섬 곳곳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이곳 섬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 중 하나다. 현재 섬에 서식하고 있는 사슴의 수는 약 600마리로 추정된다. 이곳 야생 사슴은 토착 신토에서 신의 사자로 추앙받기 때문에 오랫동안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왔다. 사슴들은 관광객을 두려워하지 않고 낮 동안 거리를 활보한 뒤 해가 지면 산책로에서 스스로 잠을 청한다.
21 이쓰쿠시마 섬에 서식하는 야생 사슴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모습
섬의 규정상 사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건 음식을 먹고 있는 관광객에게 사슴이 달려들어 음식을 빼앗으려는 진풍경이 꽤 자주 목격된다는 점이다. 특히 음식점과 카페, 상점이 줄지어 들어선 오모테산도 상점가에서 사슴의 출현은 더욱 빈번하다. 섬을 여행할 때 사슴들과 어느 정도 거리 두기가 필요한 이유다.
영화 ‘도쿄이야기’의 그 곳...오노미치 사찰과 문학의 고장...유서 깊은 항구 마을
옛 정취가 느껴지는 오노미치 혼도리 상점가 전경
오노미치 중심가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대신 배를 타기로 했다. 인근 섬들을 오가는 작은 나룻배에 몸을 맡기는 순간 항구 마을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세토 내해를 따라 히로시마현 남동부에 위치한 오노미치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찰’과 ‘문학’의 고장으로 최근 들어 일본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기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그 배경은 오노미치가 작은 항구 마을이라는 점 때문이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한적한 시간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고양이를 모티브로 한 아트와 오브제가 장식되어 있는 고양이 골목
오노미치에서는 자연의 풍광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쓰쿠시마 섬과는 또 다른 느낌의 자연을 향유할 수 있고, 오랜 세월 거친 바람과 파도를 견뎌온 항구 마을의 진한 내음을 오롯이 만끽하며, 나아가 일본 문학과 사찰의 역사를 마을 곳곳에서 살필 수 있다.
오노미치는 작은 마을답게 소소한 산책의 재미가 꽤 쏠쏠하다. 특히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형과 예스러운 좁은 거리, 돌길 위 주택가 등을 통과해 전망대로 향하는 산책길은 ‘영감의 장소’로 인식된다. 걷는 동안 마치 문학가나 예술가가 된 것 마냥 저절로 영감이 솟아오를 것 같은 분위기와 풍경이 압도적이다. 오노미치 중심가인 혼도리 상점가에서 좁은 골목길을 여러 번 통과해 영감의 장소를 즐겼다.
센코지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오노미치 도심 풍경
약 1킬로미터 가파른 언덕과 계단길을 번갈아 올라 오노미치 도심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센코지 공원 전망대에 닿았다. 예로부터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다보는 마을 풍경은 일본의 수많은 작가와 시인, 예술가, 영화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 ‘도쿄이야기’를 비롯해 여러 일본 영화의 촬영지로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전망대 동쪽에는 두 개의 산책로가 있는데, 하나는 ‘문학의 길’, 다른 하나는 ‘옛 사찰 순환로’다. 문학의 길 산책로에는 오노미치와 관련된 일본 작가들의 명언이 새겨진 24개의 돌이 놓여 있으며, 옛 사찰 순환로에는 크고 작은 유명 사찰 25곳이 동서로 약 2킬로미터에 걸쳐 연결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찰은 센코지 사찰이다.
신코지 사찰은 9세기에 지어졌다.
9세기에 지어진 센코지 사찰은 예로부터 높이 15미터의 바위 꼭대기에 새겨진 신비로운 보석이 밤에 빛을 반사해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인도했다고 전해진다. 센코지 사찰의 명물 중 하나인 리락쿠마 소원판과 부적은 대표적인 인증샷 아이템으로 꼽힌다. 센코지 사찰 외에도 616년 창건된 조도지, 사이코쿠지 등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술의 고장_히가시히로시마 사케 저장고와, 붉은 굴뚝이 있는 양조장 마을
(좌)붉은 벽돌 굴뚝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이조 사케 양조장 거리 풍경 (우)가모쓰루 사케 양조장 내부에 조성된 사케 박물관
‘히가시’는 일본어로 동(東)쪽을 뜻하는 말로, ‘히로시마에서 동쪽에 위치한 도시’라는 의미다. 히로시마와 히가시히로시마 간 거리는 약 40킬로미터다. 기차를 이용하면 약 30~40분이면 닿는다. 히가시히로시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케 양조 생산 지역 중 하나다. 크고 작은 규모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10여 개의 사케 양조장이 있으며, 대다수의 양조장은 이곳 중심부인 사이조 사케 양조장 거리를 따라 자리한다.
(좌)맨홀 뚜껑에 새겨진 술의 고장의 아이덴티티 (우)사이조 사케 양조장 거리 풍경이 그려진 우체통
양조장 거리의 하얀 사케 저장고와 붉은 벽돌 굴뚝이 어우러진 매력적인 풍경은 비단 사케 애호가가 아니어도 누구라도 전통적인 분위기에 흠뻑 취하게 된다. 양조장들의 독특한 건축 양식은 히가시히로시마 여행을 한층 특별하게 만든다. 특히 붉은 벽돌로 지어진 수십 개의 굴뚝은 일본 전통 스타일의 아카가와라 기와(붉은 기와)로 덮인 낮고 고전적인 건물 위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히가시히로시마 중심부 전역은 걸어서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규모다.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이조역 인근의 관광안내소에서 제공하는 양조장 투어 안내책자를 활용하면 보다 쉽게 양조장 탐방을 즐길 수 있다. 주변 인기 식당과 상점 등에 대한 정보가 지도와 함께 상세하게 제공된다.
붉은 벽돌 굴뚝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이조 사케 양조장 거리 풍경
히가시히로시마에서 양조장 거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미쓰성 고분이다.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미쓰성 고분은 히로시마현에서 가장 큰 열쇠구멍 모양 고분군 중 하나로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5세기경에 조성된 이 고분은 당시 아키 지역을 지배했던 유력 가문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994년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미쓰성 고분에서 남쪽으로 약 3킬로미터 이동하면 미나가 수원지가 나온다. 목가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이곳 주변에 숨어 있듯 아즈마코 폭포가 자리해 있다. 도심의 화려한 양조장 거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박하고 서정적인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좌)미나가 수원지 인근 아즈마코 폭포 공원 (우)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5세기경 조성된 미쓰성 고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