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도 아닌데 세계가 한국 정유에 줄 섰다…중동 전쟁 뒤집은 K오일의 힘

권순우 기자 2026. 5. 1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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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원유를 생산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중동 전쟁 이후 글로벌 석유제품 시장에서 한국 정유 산업의 존재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부각되고 있다. 원유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 원유를 제품으로 바꿔 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더 중요해지는 국면이 열렸기 때문이다.

윤재성 하나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한국 정유 산업이 단순한 경기민감 업종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안보의 핵심 축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고 봤다. 그동안 한국 정유사는 원유 시장에서는 공급을 좌우하는 스윙 프로듀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휘발유와 경유와 항공유 같은 석유제품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한국은 글로벌 정제 능력 기준으로 5위권에 있고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수출한다. 글로벌 정제 능력 1위는 중국이고 2위는 미국이며 3위는 러시아다. 4위는 인도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대부분 내수 수요가 크거나 수출 제약이 있거나 설비 피해를 입은 상태다. 중국은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있고 미국은 자국 내 휘발유 재고가 부족하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정제 설비 일부가 타격을 받았고 인도 역시 자국 수요가 크다. 결국 국제 석유제품 시장에서 실제로 팔 수 있는 물량을 가진 나라는 제한적이다.

한국 정유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설비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은 중동산 중질 원유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설비를 고도화해 왔다. 같은 원유를 들여와도 더 효율적으로 휘발유와 경유와 항공유를 뽑아낼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일본이나 호주가 과거 정제 설비를 줄이는 동안 한국은 대규모 정제 설비를 유지했고 화학 산업과 연결된 수직 계열화 구조도 보존했다. 과거에는 이런 구조가 경직성으로 보였지만 이번 위기에서는 오히려 전략 자산이 됐다.

단기적으로는 불확실성이 크다. 윤재성 수석전문위원은 이란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 정유 업종에 대해 섣부른 추천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 유가가 더 오르면 수요가 꺾일 수 있고 유가가 급락하면 재고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장기 그림은 다르다. 중동의 정제 설비와 러시아 정제 설비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 지역 정제 설비 피해는 글로벌 기준 약 4% 수준으로 보이고 러시아까지 합치면 6~7% 수준의 공급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정유 산업에서 연간 1% 증설도 큰 변화로 여겨지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한 충격이다. 전쟁이 멈추더라도 설비 복구에는 1년에서 1년 반이 걸릴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 문제도 단순한 통항 문제가 아니다. 해협 안쪽에 갇힌 선박들이 빠져나오고 다시 들어가 원유를 싣고 나오는 과정 자체가 병목을 만들 수 있다. 이미 항차 사이클이 꼬였고 항만 적체가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유정이 멈추면 다시 가동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이 구간에서 한국 정유사의 역할은 더 커진다. 원유 가격은 시간이 지나며 낮아질 수 있지만 석유제품 가격은 정제 설비 부족 때문에 쉽게 내려가지 않을 수 있다. 원유와 제품 간 스프레드가 벌어지면 한국 정유사는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면서 마진을 확보할 수 있다.

더 중요한 변화는 원유 조달 구조다. 그동안 아시아 정유사는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았다. 하지만 이번 전쟁을 계기로 중동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산 원유와 서아프리카산 원유, 브라질 원유, 알래스카산 원유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흥미로운 점은 중동산 원유 가격의 상대적 약세 가능성이다. 지난 15년 동안 미국산 WTI는 두바이유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미국 셰일 생산이 늘어난 영향이었다. 그러나 미국 셰일 생산이 한계에 가까워지고 중동 산유국의 가격 결정력이 약해지면 이 구도가 뒤집힐 수 있다. 아시아 정유사가 중동산 원유를 더 유리한 조건으로 조달할 수 있다면 한국 정유사의 원가 경쟁력은 구조적으로 개선된다.

화학 산업도 같은 흐름 안에 있다. 한국 화학 산업은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의 대규모 증설과 공급 과잉에 시달렸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일부 회복 조짐이 있었고 이번 사태는 글로벌 구조조정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중동은 정제 설비와 전력과 도로와 항만 같은 기본 인프라 복구가 우선이에 화학 설비 증설은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 기존 설비 복구도 벅찬 상황에서 신규 화학 설비 투자가 예정대로 진행되기는 어렵다.

중국 변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의 화학 증설 계획은 글로벌 예정 증설의 상당 비중을 차지한다. 다만 중동의 증설 지연과 기존 설비 피해와 글로벌 재건 수요가 겹치면 한국 화학 산업도 바닥을 지나 회복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예전처럼 강한 슈퍼 사이클을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최악의 공급 과잉 국면에서 벗어나는 신호는 뚜렷해지고 있다.

이번 변화는 조선과 철강과 피팅, 해양플랜트로도 이어진다. 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은 브라질과 서아프리카와 알래스카와 동남아 심해 자원에 다시 관심을 두고 있다. 브라질 심해 유전은 5~7km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초심해 영역이다. 이 과정에서 해양플랜트와 특수 강관과 피팅과 선박 수요가 발생한다. 중동 정제 설비와 화학 설비를 복구하는 데도 파이프와 밸브와 피팅이 필요하다. 결국 정유 산업의 위상 변화는 한국의 전통 제조업 전반에 파급될 수 있다.

LNG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일본 상사들이 미국 가스 자산을 대거 사들인 이유는 에너지 가격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해서다.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늘어나면 가스 가격도 오를 수밖에 없고 이를 방어하려면 가스 자산 자체를 보유해야 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과 SK이노베이션 등이 보유한 해외 가스전, 유전 자산의 가치가 다시 부각될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호주 바로사 가스전과 동남아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위기 국면에서는 이런 상류 자산이 단순 투자자산을 넘어 국가적 안전판이 된다.

미국 LNG 수출 터미널 확대도 한국 조선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산 LNG 수출이 늘어나려면 운반선이 필요하다. 카타르와 중동 공급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미국이 대체 공급자로 부상하면 LNG 운반선 발주 수요는 더 강화될 수 있다. 이는 조선과 기자재와 철강 업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반도체만으로 오른 한국 증시에 에너지와 조선과 산업재 사이클이 함께 붙을 경우 시장의 주도 업종 구도도 달라질 수 있다.

정유 산업은 오랫동안 저평가 업종이었다. 경기 좋을 때 마진이 오르고 경기 나쁠 때 꺾이는 전통적 사이클 산업으로 여겨졌다. 윤재성 수석연구위원은 10년 넘게 이 섹터를 분석하면서 정유 업종의 밸류에이션 리레이팅을 논한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그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다. 한국 정유사가 단순히 원유를 사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글로벌 석유제품 공급망을 지탱하는 전략 인프라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유가 급등이 수요를 훼손하고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동시에 흔들 수 있다. 전쟁이 갑자기 끝나도 단기 재고 손실과 유가 하락 충격이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단기 주가 전망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 이후 세계가 중동 의존도를 낮추고 정제 설비의 전략적 가치를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은 원유를 생산하지 않지만 원유를 가장 필요한 제품으로 바꿔 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나라다. 이번 위기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한국 정유 산업의 실질 가치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