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서 최초 공개된 유서 깊은 집, 가구에 숨결을 불어넣다

아르떼 2026. 5. 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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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밀라노 디자인 위크]
프랑코 알비니 '빌라 페스타리니'
오스발도 보르사니 아파트
한스 J. 웨그너 밀라네제 아파트

디자인 위크의 여러 곳 중에서 ‘최초’ 공개라는 수식어는 그 자체로 특별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올해 처음 마주한 사적인 공간에서 예술과 생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찰나, 사용자의 손길이 담긴 가구들이 비로소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정서적 안정과 촉각적 경험을 갈망하는 시대, 디자인 전시를 위한 최적의 무대는 지극히 내밀한 ‘집’이라는 원형적 장소로 회귀하고 있다. 이러한 큐레이션 방식이 더욱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것이 제안하는 환대의 농도와 실재하는 삶의 진실성 때문일 테다. 정형화된 화이트 큐브를 탈피해 밀라노의 유서 깊은 주거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세 가지 전시 현장을 찾았다.

프랑코 알비니의 빌라 페스타리니

매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가장 파격적인 장소와 창의적인 이름을 발굴해 온 전시 플랫폼 알코바가 올해 선택한 곳은 베일에 싸여 있던 빌라 페스타리니(Villa Pestarini)였다. 1930년대 말 완공된 이 빌라는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의 거장, 프랑코 알비니(Franco Albini)가 남긴 유일한 개인 주택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다. 지난 수십 년간 소유주의 헌신적인 관리 덕분에 원형 그대로 보존된 이곳은 프랑코 특유의 엄격한 질서와 시적인 정취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서른세 살의 젊은 알비니가 설계한 이 집은 절제된 기하학적 구조가 압권이었다. 새하얀 직사각형에 빛을 부드럽게 여과하는 유리블록 파사드와 정원의 풍경을 집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커다란 창은 공간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입장하자마자 경사가 완만한 대리석 계단과 유연하게 공간을 구획하는 슬라이딩 파티션 및 맞춤 제작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거장의 유산을 마주하며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과제를 수행했다. 특히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가 까시나(Cassina) 및 오피스 가구 브랜드 헤이워드(Haworth)와 선보인 협업은 단연 화제였다. 카시나가 독점 재발행한 알비니의 아이코닉한 가구들은 과거의 미학이 동시대 라이프스타일에 스며드는 과정을 선명하게 입증했다. 또한 알비니의 제자였던 건축가 루이사 카스티글리오니(Luisa Castiglioni)를 오마주한 보카몬테(Boccamonte)의 미공개 가구 컬렉션도 최초 공개하며 무게감을 더했다.

오스발도 보르사니의 아파트

디자인 위크에서 존재감을 각인시켜 온 디모레스튜디오의 에밀리아노 살치와 브릿 모란이 2024년 론칭한 독립 브랜드 인테르니 베노스타(Interni Venosta)의 신규 컬렉션을 소개하는 초대장을 띄웠다. 창의 듀오가 선점한 공간은 밀라노 도심 비아 빌리 21번지(Via Bigli 21)에 위치한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팔라초 올리바치(Palazzo Olivazzi). 그 안에서도 그간 공개된 적 없던 비밀스러운 개인 아파트다.

저택의 육중한 입구를 통과해 석조 계단을 오르면, 오스발도 보르사니(Osvaldo Borsani)가 1940년대 말 완성한 집이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전후 이탈리아 디자인 특유의 우아함과 정교함이 응축된 이 장소는 형식적 엄격함과 균형미를 보여주었다.

내부에는 가죽과 고급 목재로 마감된 오스발도의 오리지널 가구들이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었다. 20세기 이탈리안 엘레강스를 계승하며 유행을 초월한 가치를 지향해 온 에밀리아노와 브릿의 컬렉션은 〈인테르노 이탈리아노(Interno Italiano)〉라는 주제 아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건축물과 공명했다. 거실과 식당을 구분 짓는 조각적인 칸막이와 부조 장식의 벽난로는 존재만으로도 예술성을 뿜어냈다. 여기에 래커 칠한 황동과 매끄러운 스틸, 버얼(Burl) 우드 등 밀도 높은 소재를 배치해 시각적인 변주를 더 했다. 간결한 소품들은 오히려 벽면 몰딩과 문틀과 같은 고전적 형상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거주자의 심미안을 투영한 이 세련된 큐레이션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창작자들의 운명적인 만남을 보는 듯한 감동을 선사했다.


한스 J. 웨그너 밀라네제 아파트

디자인 위크의 열기가 가장 뜨거운 브레라 지구, 그 중심부인 솔페리노 거리의 한 아파트에 20세기 대니시 모던의 정수를 세운 한스 J. 웨그너의 주거 공간이 문을 활짝 열었다. 이 흥미로운 가상 프로젝트를 기획한 칼한센앤선은 인근에 자체 플래그십 스토어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실제 밀라네제의 일상이 녹아든 장소를 택해 몰입감을 더했다.

〈균형 잡힌 원칙 – 웨그너의 비전(Balanced Principles – Visions of Wegner)〉 전시는 거장의 손길이 깃든 아카이브와 신제품을 엄선해 따뜻한 환대의 공간을 펼쳤다. 테라초 바닥, 높은 층고와 몰딩, 독특한 창문의 형태 등 밀라노 아파트에서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대니시 디자인과 만나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리셉션 룸에서는 유려한 곡선의 CH07 쉘 체어를 마련해 두었다. 이곳에서는 생전 일요일마다 가족을 위해 축음기로 클래식 음악을 틀고 피아노 연주를 즐겼던 그의 취향을 반영한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오며 따뜻한 환대의 공간을 예고했다.

채광이 좋은 거실에는 CH24, HJW02 오팔라 테이블 램프, CH25 라운지체어 등을 활용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거실 한편은 독서 중이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풍경을 그려냈다. 무심하게 펼쳐진 노트와 『 작은 아씨들』을 비롯한 서적들, 온기가 남은 듯한 커피 한 잔과 벗어 놓은 안경은 생활의 흔적을 실감 나게 부여했다.

서재로 발걸음을 옮기면 벽면을 빼곡히 메운 서적들 아래로 신규 컬렉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장이 가능한 CH086 테이블과 오리지널 피스의 길이가 무려 9m에 달하는 CH280 소파는 안락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작업실에는 거장의 손길이 닿은 사유의 파편들이 가득했다. 흑백 사진, 각종 드로잉과 앙증맞은 미니어처 의자들은 평생 500여 점의 명작을 남긴 한스 J. 웨그너의 지치지 않는 열정을 고요히 증언했다.

밀라노=유승주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