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고장나면 잠 안 와” 68세 엔지니어의 고백… 다시 켜진 베테랑의 시간

강승구 2026. 5. 1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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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갈 곳이 생겨"… 은퇴 세대 다시 현장으로
장난감 고치고 공정 노하우 공유하는 장인들
부산 금정구 우리동네 ESG센터 1호점에서 어르신들이 고장 난 장난감을 수리하고 있다. 사진=강승구 기자


"요즘 보면 에어콘에 밀린 멀쩡한 선풍기들이 많이 버려지더군요. 조금 오래됐을 뿐이지 아직 충분히 돌아가거든요. 우리도 비슷합니다."

지난 7일 부산 금정구 우리동네 ESG센터 1호점에서 만난 최수철(67) 씨는 자신을 버려진 선풍기에 빗댔다. 젊은 세대에 밀려나지만, 여전히 젊은이들 못지않게 일할 힘이 남았다고 했다.

중학교 교사로 35년 일한 그는 퇴직 후 1년간 여행을 다니며 시간을 보낸 후 함께 근무했던 선배가 다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같은 곳에서 환경 도슨트로 출근을 시작했다.

센터에서는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다시 출근길에 오른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센터 입구에는 어르신들이 내린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곳곳에는 폐플라스틱을 활용해 만든 업사이클링 제품이 놓여 있었다.

역할도 다양했다. 교사 출신 어르신들은 환경 도슨트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기술직 출신들은 장난감과 폐플라스틱을 다시 손봤다. 방에 들어서자 전동 드라이버와 망치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멈춘 장난감에 다시 움직임을 불어넣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퇴직 전 조선소 현장에서 선박 안전 인증 업무를 맡았던 이충남(68) 씨가 7일 부산 금정구 우리동네 ESG센터 1호점에서 노인역량활용사업 참여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강승구 기자


이충남(68) 씨는 요즘 장난감 기판과 씨름한다. 그는 "칩이 손상돼 작동이 안 되면 밤에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멈춘 장난감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손끝에는 기술자의 자존심이 묻어났다.

이 씨는 뼛속까지 엔지니어였다. 정년 전까지 조선소 현장에서 선박 안전 인증 업무를 맡았다. 배를 검사한 뒤 국제 기준에 맞으면 출항 인증을 내주던 그는 작동을 멈춘 장난감 앞에서 다시 드릴을 잡고 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시 갈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맙다"고 말했다.

노인 일자리는 다변화하고 있다. 과거엔 거리 환경정비나 단순 공익활동 중심이었다면 최근 교육과 돌봄, 자원순환, 민간 연계형 일자리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노인 일자리 사업은 총 115만2000개로 확대됐다. 유형별로는 공공형 노인공익활동사업이 70만9000개로 가장 많고, 경력과 전문성을 활용하는 사회서비스형은 19만7000개다.

노인 일자리는 민간 분야로도 넓어지고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기업 고용과 연계한 '현장실습훈련 지원사업'을 운영 중이다. 기업에 인건비 일부를 지원해 60세 이상 고령층의 실무 경험과 재취업을 돕는 방식이다. 세대통합형 사업 참여자는 지난해 2227명이었고, 올해 참여 기업은 234곳에 달한다.

고려아연에 재고용된 시니어 근로자가 현장에서 후배 직원들에게 공정 운영과 설비 관리 노하우를 설명하고 있다. [고려아연 제공]


울산 울주군에 있는 고려아연에서는 작업복 차림의 재고용 근로자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 1965년생이었다. 정년퇴직 뒤 다시 공장으로 돌아온 이들에게서는 여전히 현장을 꿰뚫는 장인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권오(62) 씨는 후배 직원들을 "아들 같은 애들"이라 불렀다. 그는 "예전에는 반장으로 관리했다면 지금은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라며 "공정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몸으로 알려준다"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신규 제련소와 리사이클링 공장, 미국 제련소 검토 사업 등에 시니어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고려아연은 30년 넘게 현장을 지킨 숙련 인력이 공정 안정과 기술 전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울산남구시니어클럽 시장형사업단 '대나무향기'에서 일하는 하춘자(73) 씨가 손님에게 내놓을 음식을 조리하고 있다. 사진=강승구 기자


현장 어르신들은 대부분 일자리가 단기 계약 중심이다 보니 연말이 되면 "내년에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다고 전했다.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노인 일자리는 이제 단순 생계 지원을 넘어 경험과 기술을 다시 사회와 연결하는 과제가 되고 있다.

고령 사회로 접어들며 노인 일자리 수요는 커지고 있다. 부산은 올해 1월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5.4%에 달하는 초고령 도시다. 은퇴 뒤 다시 사회와 연결되려는 움직임도 늘면서 센터는 2022년 이곳 1호점을 시작으로 부산시 16개 구·군으로 확대되고 있다.

김수영 노인인력개발원장은 "과거 노인 일자리라 하면 교통안전 도우미나 거리 환경정비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환경과 산업 현장으로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며 "금속·에너지 산업뿐 아니라 조선·방산 분야까지 숙련 기술과 경험을 가진 시니어 인력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확대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산/글·사진=강승구 기자 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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