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한 시간, 포천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이다. 500년 역사를 품은 울창한 광릉숲에서 시작해 명성산 그림자가 드리운 산정호수를 걷고, 수만 년 전 용암이 빚은 한탄강 협곡에서 대지의 숨결을 느껴보시길. 허브 향 가득한 언덕과 채석장이 변신한 예술 공간까지, 포천은 자연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여행지다.
국립수목원 전나무숲길
포천 여행은 숲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남양주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47번 국도를 달리다 98번 지방도로 접어드는 순간, 온세상이 달라진다. 어수선한 간판과 건물이 사라지고 대신 수령 100년을 훌쩍 넘긴 전나무와 서어나무들이 도열하며 여행자를 맞이한다. 창문을 내리면 이른 봄 공기가 물밀듯 밀려온다. 차갑고 싱그러운데 어딘가 달큰하다.
국립수목원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에 자리해 있다. 오래도록 광릉숲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수목원 가까이에 광릉이 있기 때문이다. 광릉은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임금이었다.
국립수목원 전나무숲길
그 위세는 죽어서도 이어졌다. 조선 왕실은 광릉을 중심으로 사방 15리, 약 3,600헥타르에 달하는 숲을 능림으로 지정해 조선 말기까지 철저히 보호했다. 한국전쟁의 총탄도, 개발의 손길도 이 숲을 건드리지 못했다. 1987년 광릉수목원으로 조성됐고,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승격됐으며,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500년이 넘도록 온전히 살아남은 숲이다.
거대한 나무 기둥들의 숲
광릉숲에 들어서기는 다소 까다롭다. 입장은 예약제로만 가능하다.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 전에는 한 발짝도 들어설 수 없다. 번거롭다 싶지만, 막상 숲 안으로 발을 들이면 그 수고스러움은 기꺼워진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도 숲속은 어둑하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빽빽이 가려 햇빛이 스며들 틈이 없다. 공기는 서늘하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감싸면 소름이 돋는다.
국립수목원 전나무숲길
수목원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간은 인공호수 육림호에서 산림동물보존원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이다. 1.7킬로미터 구간으로, 1927년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의 종자로 조림한 나무들이 지금은 하늘을 가릴 만큼 자랐다. 수령이 90년을 넘긴 나무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 그 사이를 걸으면,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기둥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시험림까지 포함한 전체 면적은 2,118헥타르, 약 660만 평에 이른다. 우리에게 허락된 공간은 그중 극히 일부다. 육림호 주변까지만 다녀와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느린 걸음으로 30분이면 닿는 거리에 작은 호수가 있고, 그 둘레로 나무 산책로가 이어진다. 봄빛이 내려앉은 호수면은 고요하고 맑다.
광릉
수목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광릉이 있다. 행정구역상 남양주시 진접읍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현재 119기, 그중 왕과 왕비의 무덤만 42기다. 500년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매표소를 지나면 신록이 고운 숲길이 이어진다. 국립수목원의 장엄함과는 결이 다른, 정겹고 친근한 숲이다.
산속 호수를 걷다
포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를 하나만 꼽으라면 산정호수다.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이곳은 ‘산속의 우물(山井)’이라는 이름처럼 명성산(923미터)과 망봉산, 망무이 병풍처럼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포천의 가장 북쪽, 강원도 철원과 경계를 맞댄 곳에 자리한 이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평온함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산정호수
사실 산정호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자연 호수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인근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광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막아 만든 인공 저수지다. 하지만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공의 흔적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산그림자가 호수 깊숙이 몸을 담그고,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모습은 인공의 역사를 지우고도 남을 만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산정호수를 가장 깊게 감상하는 방법은 호수를 한 바퀴 도는 5km의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궁예 코스’, ‘희망 코스’ 등으로 불리는 이 산책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을 만큼 평탄하고 정갈하다. 특히 봄의 산정호수는 걷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호수가 뱉어내는 비릿하면서도 싱싱한 물 냄새,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초록빛 잎사귀들이 호수 주변을 감싸 안는다.
산정호수
산책로의 하이라이트는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데크 탐방로 구간이다. 수변을 따라 설치된 이 길을 걷다 보면 명성산과 망봉산, 망무봉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오고, 그 풍경이 호수 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물 위에 뜬 산을 바라보는 그 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매혹적이다. 일부 구간에는 수면 위로 나무 데크 탐방로가 설치돼 있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 오를 무렵이나 해 질 녘 노을이 수면을 붉게 물들일 때, 이 탐방로 위에 서면 산과 물과 하늘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풍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명성산에는 후 고구려를 세웠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이곳까지 밀려와 통곡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산의 이름인 ‘울음산(鳴聲)’도 거기서 기인했다. 궁예의 패망을 슬퍼하며 산과 호수가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는 산정호수의 풍경을 한층 더 깊게 만든다.
포천 산정호수
둘레길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조형물과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김일성 별장’ 터가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전경은 이곳이 왜 과거부터 최고의 명당으로 꼽혔는지를 단번에 이해하게 해준다. 반달 모양으로 굽어든 호수 너머로 명성산의 줄기가 유려하게 뻗어 나가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평온하게 가라앉힌다.
이맘때 산정호수를 찾으면 봄의 햇살이 호수 한복판에 떨어져 수면은 보석을 뿌려놓은 듯 윤슬로 반짝인다. 그 빛의 무리를 바라보며 걷다 보면 마음속에 쌓였던 해묵은 고민들이 조금씩 휘발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포천 인공호수 육림호
수변로를 따라 늘어선 카페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커피 향과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풍경은 이 여정의 백미다. 호수 위를 떠다니는 오리배와 함께 호수 초입의 조각공원에서는 자연과 예술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여행자를 반긴다.
산정호수를 한 바퀴 다 돌고 나면 대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적당한 피로감이 몰려올 때쯤 호수 인근의 식당가에서 따뜻한 보리밥이나 도토리묵을 곁들이면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산속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평온함은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힘을 조용히 건네준다. 산정호수는 그렇게 100년의 시간을 품고, 오늘도 명성산의 품 안에서 묵묵히 빛나고 있다.
인공호수 육림호
한탄 8경을 따라가다
포천의 북쪽으로 향하면 내륙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이국적이고 장엄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만 년 전, 지금의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군 오리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한탄강 물길을 따라 흘러내리며 빚어놓은 현무암 협곡과 주상절리대다. 포천시는 이 거대한 자연의 조각품들 중 특히 빼어난 여덟 곳을 추려 ‘포천 한탄 8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천 비둘기낭 폭포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정취를 자아내는 곳은 영북면 대회산리에 자리한 제6경 비둘기낭 폭포다. 평범한 평지처럼 보이다가도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갑자기 40미터 깊이의 거대한 수직 낭떠러지와 현무암 동굴이 나타나 보는 이를 압도한다. 예로부터 수백 마리의 산비둘기가 서식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이곳은 비취색 소(沼)와 주상절리 협곡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제2경 화적연(禾積淵)은 겸재 정선이 그의 서화집 ‘해악전신첩’에 그려 넣었을 만큼 유서 깊은 비경이다. 한탄강 굽이치는 물줄기 한가운데에 높이 13미터의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모양이 볏 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다 하여 ‘화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맑은 강물이 바위 발치를 휘감아 도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용이 물가에 몸을 뉘고 쉬는 듯한 장엄함을 선사한다.
국립수목원
이 밖에도 포천 한탄 8경은 자연이 허락한 다채로운 얼굴을 품고 있다. 용암이 식으면서 만들어낸 기하학적인 멍우리 주상절리대와 구라이골, 가마솥을 닮은 교동가마소, 그리고 강물이 합쳐지는 지점의 아우라지 베개용암 등은 화산 활동이 남긴 위대한 흔적들이다.
한탄강을 따라 이어진 탐방로를 걷다 보면 수만 년의 시간을 견뎌온 현무암의 검은 빛깔과 신록이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이 길은,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을 넘어 대지의 역사를 온몸으로 감각하는 시간이다. 그만큼 포천 한탄 8경은 자연이 빚은 가장 정교한 예술이자, 우리가 잊고 지냈던 원시의 숨결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허브와 예술로 더 향기로운 봄
포천 허브아일랜드 전경
포천의 드라이브 코스를 따라가다 보면 감각의 전이(轉移)를 경험하게 되는 두 곳을 만난다. 바로 향기로 기억되는 ‘허브아일랜드’와 돌의 서사로 쓰여진 ‘포천아트밸리’다.
신북면 삼정리 언덕배기에는 4월의 향기가 가장 먼저 당도한다. 1998년 문을 연 허브아일랜드는 1만 평의 대지에 2,000여 종의 허브가 식재된 유서 깊은 곳이다. ‘허브 섬’이라는 이름처럼 농원 전체가 향기로운 식물들로 뒤덮여 있으며,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유럽 마을을 테마로 꾸며져 동화 속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허브아일랜드
이곳은 허브의 모든 것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공간이다. 허브박물관과 세계 최초의 허브식물박물관을 비롯해 허브공방, 꽃가게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봄의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반짝이는 정원을 걷다 보면 로즈메리와 라벤더의 화한 향기가 여행자의 후각을 자극한다. 허브 베이커리에서 구워내는 고소한 빵과 허브 레스토랑의 건강한 맛을 즐기며 카페에 앉아 있으면, 일상의 소란스러움은 어느덧 저 멀리 물러난다.
여행의 마침표를 찍기에 좋은 포천아트밸리는 포천의 상징인 화강암, 즉 ‘포천석’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다. 과거 이곳은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등 주요 건축물의 자재로 쓰인 화강암을 캐내던 채석장이었으나, 소임을 다한 뒤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던 석산 산자락을 2003년부터 친환경적으로 복원해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포천 아트밸리 천주호
화강암을 깎아냈던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에메랄드빛 ‘천주호’가 들어서 신비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봄의 투명한 햇살이 수직 절벽의 화강암 무늬를 비출 때, 호수는 더욱 깊고 푸른 빛을 발산한다.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며 내려다보는 풍경은 채석장의 거친 흉터가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버려진 돌산에서 피어난 예술의 꽃을 마주하며 재생과 치유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은 포천 여행이 선사하는 가장 묵직한 위로가 된다.
포천 여행 정보
수목원 가는 길에 광릉불고기가 있다. 숯불향이 가득하고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밑반찬도 푸짐하게 나온다. 아이들도 잘 먹어 가족 단위 여행객이 방문하기 좋다. 허브아이랜드에서는 허브 비누, 허브 향수 등 허브로 만든 다양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포천 허브아일랜드
파주골순두부는 직접 콩을 갈아 부드러운 두부를 만들어낸다. 두부와 어울리는 무채 등 몇몇 밑반찬을 내놓고 두부, 된장찌개 등을 곁들이는데, 뭉근하게 끓인 순두부가 아주 맛있다. 포천 먹거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동갈비다. 이동면 장암리에 이동갈비 거리가 만들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