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동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

박경미 2026. 5. 1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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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 19
사진=AI 생성

"그만 좀 붙잡아요! 나 빨리 동대문시장에 가야 해요, 장사 다 망한다고요!"

오후 5시가 되자 오늘도 병동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지난주에 입원한 80대 여자 환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린다. 아침에는 방긋방긋 웃으며 의료진을 반기는 분이지만, 해가 넘어갈 시간만 되면 짐을 꾸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 동대문에 옷을 떼러 가야 한다며 온 병동을 돌아다닌다. 다른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막아서는 간병인에게 소리를 지른다.

환자는 오랫동안 작은 옷가게를 운영했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냈지만 1남 2녀를 훌륭히 키워냈다. 10여 년 전 몸이 약해지면서 가게를 정리했고 이후에 특별히 아픈 데는 없이 지내다가 3~4년 전부터는 기억력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드니까 건망증이 생기나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최근 1년 사이에는 익숙한 동네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거나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딸에게 전화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가족 모두 심각성을 느끼게 됐다. 밤에는 잠꼬대를 심하게 하고 몸부림을 쳐서 침대 옆에 물건을 두기 어려워졌고, 방 안에 낯선 사람이 있다며 헛것을 보는 일도 생겼다.

그녀의 병명은 루이소체 치매이다. 루이소체 치매는 치매의 한 종류로, 인지 기능 저하와 함께 파킨슨병처럼 몸이 뻣뻣해지는 운동 증상이 나타나며, 환각, 환청, 망상 같은 정신 증상도 흔히 동반된다. 하루 중에 증상의 기복이 크다는 점도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수면 중 몸을 움직이게 되는 렘수면행동장애 또한 루이소체 치매에서 나타날 수 있는 증상 중 하나이다. 치매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하루 종일 비슷한 정도로 기억력 저하를 보인다. 이와 달리, 루이소체 치매 환자는 아침에는 이전처럼 평범하게 이야기하다가도 오후만 되면 혼란이 심해지는 등 증상이 악화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치매 환자에게는 해질녘부터 밤 사이에 불안, 초조, 안절부절 못함, 혼란, 배회, 공격적인 행동 등이 악화되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를 일몰증후군(sundowning)이라고 한다. 치매 환자를 곁에서 돌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낮에는 얌전하던 분이 해만 지면 귀신같이 알고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어디론가 가려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치매는 뇌의 퇴행성 질환이다. 즉, 기억력뿐 아니라 뇌에서 관장하는 모든 기능이 떨어진다. 따라서 우리 몸 안에 있는 생체 시계에도 장애가 발생한다. 정상적인 생체 시계를 가진 사람들은 낮에 활동을 하고 밤에 수면을 취한다. 그러나 치매 환자의 경우 이 생체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낮에는 잠을 자는 것처럼 나른하고 밤에는 오히려 활동성이 높아진다. 여기에 뇌 기능 저하까지 더해지다 보니 활력이 넘치기보다는 짜증과 불안이 심해진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다. 낮에는 여기가 병원이라는 것도 알아보고, 자신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입원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며 자녀들을 걱정한다. 그러나 해가 지면 그녀는 다시 혼란 속에 빠진다. 아마 그녀의 눈에는 바쁘게 오가는 시장 사람들과 텅 빈 옷가게가 보이고 있을 것이다. 새벽에 서둘러 옷을 떼어 와야 가게 문을 열 수 있고, 그래야 어린 자녀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지금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일까.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자녀들 역시 속상해서 눈물을 흘린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상처받는 사람들만 있다.

이런 치매 환자들의 치료 목표는 입원 기간 중 환자가 최대한 편안한 상태로 지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무작정 졸린 약을 주고, 행동을 제한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물론 감정과 행동 조절을 위해 적절한 약물을 투약하는 것은 환자와 가족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약으로 환자를 하루 종일 재워서 행동 문제를 없애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치매 환자를 볼 때 중요한 점은, 치매로 인해 가장 혼란스럽고 불안한 것은 다름 아닌 환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않으면 치매 환자에게 아무리 약을 많이 써도 문제 행동은 조절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보호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치매를 완전히 고칠 수 있는 치료법은 현재까지 없다. 최근 알츠하이머 치매의 원인 물질인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축적을 제거하는 신약 '레켐비'가 출시되었지만, 이 약도 치매의 진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진행 속도를 늦추는 약이다. 따라서 안타깝게도 치매 환자의 증상을 치매에 걸리기 이전처럼 좋아지도록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특히 치료 초기에 보호자가 이를 미리 알 수 있도록 하고, 환자에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몰아붙이거나 상태 호전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품지 않도록 안내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많은 만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치매 환자의 보호자 또한 오랜 간병으로 지쳐 있는 이가 많다. 이런 보호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해 주는 것 역시 입원전담전문의로서 해야 할 일이다.

이 환자는 일몰증후군이 심했기 때문에 생체 시계를 바로 잡는 약물 치료와 행동 치료를 했다. 먼저, 낮에는 햇빛을 충분히 쐬도록 하고, 졸리더라도 자지 말고 걸어 다니도록 격려했다. 밤에는 활동을 최소화하여 이른 시간에 잠들 수 있도록 유도했다. 간병인이 자주 바뀌지 않도록 하고 보호자가 일정한 시간에 면회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루 일과의 규칙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인지 저하로 인한 혼란과 우울,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약물 치료와 면담 치료를 병행했으며, 환각과 혼란을 줄여주는 약물과 인지 기능을 도와주는 약물도 함께 처방하였다. 보호자가 환자의 상태를 잘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도록 교육 및 면담도 함께 진행하였다.

다행히 약 4주간의 치료 끝에 일몰증후군 증상은 호전되었고, 환각도 감소하여 그녀는 더 이상 병동을 헤매지 않고 보호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치매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언젠가 그녀가 다시 이 병동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해가 질 때마다 그녀가 애타게 병동을 헤매지 않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박경미 교수 (kmpark87@yuh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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