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칼럼] 기억 잃어도 인생을 잃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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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기억'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기억의 끈을 놓아버린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마치 그분들의 인생 전체가 지워진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슬퍼한다.
설령 그분들이 자신의 역사를 잊었을지라도, 긴 시간을 함께 지나오며 그 보살핌을 품고 살아온 우리가 기억해 나가면 된다.
우리는 이제 '기억'이라는 잣대를 내려놓고, 인생 그 자체를 온전히 품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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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희 희연 치매전담형 주간보호시설 시설장
우리는 흔히 ‘기억’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믿는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삶의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기억의 끈을 놓아버린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마치 그분들의 인생 전체가 지워진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슬퍼한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다. 기억은 인생의 일부일 뿐 인생 그 자체가 아니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마치 서재의 책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책이 없어진다고 해서 서재라는 공간의 아늑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치매라는 질환이 어제의 일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앗아갈지언정 그가 평생을 일궈온 성품과 따뜻한 눈빛, 그리고 삶을 향한 근원적인 태도까지 앗아가지는 못한다. 비워진 자리에 남는 것들은 생각보다 분명하다.
우리는 기억을 잃어버린 분들을 보며 ‘빈 껍데기만 남았다’고 말하는 큰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에 미소 지으며, 진심 어린 손길에 안도감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의 존재’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현재의 감정까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어제의 나’가 아닌 ‘오늘의 당신’으로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나를 알아보겠어?”, “기억 안 나?”라는 질문은 어쩌면 그들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그들과 어떤 연결을 맺고 있느냐다. 이름을 부르지 못해도 손을 맞잡을 수 있고, 과거의 추억을 공유하지 못해도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기억이 떠난 자리에는 ‘함께 있음’이라는 더 원초적이고 단단한 가치가 들어선다.
마지막으로 꼭 덧붙이고 싶다. 존엄은 기억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뇌세포의 활성도나 정보 저장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한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발자취, 자식들을 키워낸 거친 손마디, 그리고 수많은 풍파를 견뎌낸 고결한 영혼은 기억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황금빛 들녘과 푸른 바다를 닮은 우리 부모님들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설령 그분들이 자신의 역사를 잊었을지라도, 긴 시간을 함께 지나오며 그 보살핌을 품고 살아온 우리가 기억해 나가면 된다.
“기억을 잃어버려도 인생을 잃은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이 세상에 남긴 사랑의 흔적과 존재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기억의 실타래가 엉키고 끊어져도 그분들의 인생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우리는 이제 ‘기억’이라는 잣대를 내려놓고, 인생 그 자체를 온전히 품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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