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라는 도시와 김부겸이라는 사람, 그 둘의 화학작용

아주 오랜만에 정치인의 연설이 뭇사람의 입길에 오르내린 날이었다. 국회 의원회관의 보좌진들은 “당장 대구로 뛰어 내려가고 싶다”라고 말했고, 정치부 기자들은 캠프 관계자에게 연락해 “정치의 품격을 봤다”라는 감상평을 전했다. 연설을 중계한 영상은 조회수 수십만 회를 기록하더니 급기야 과거 연설 영상까지 재소환되었다. 대구 사람은 대구 사람이라서 울컥한다는 댓글을, 타 지역 주민은 대구 사람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3월30일, 김부겸(68)이 다섯 번째로 대구 출마를 공식 선언한 날이었다.
그날은 비 오는 평일 오후였음에도, 대구시 중구 2·28 기념중앙공원에는 시민 200여 명이 모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대구 시민들이 일으켰던 ‘2·28 민주운동’이 일어난 2월28일은 문재인 정부에서 김부겸이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일하던 시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지금 대구에 필요한 사람, 김부겸’이라는 슬로건이 적힌 2·28 공원 연단 앞에 그가 섰다.
명연설가로 정평이 난 그이지만, 정치 인생 39년의 “마지막 소명”이라며 꺼내든 출마 선언문은 그 어느 때와도 달랐다. 대구에서 네 번 출마해 세 번 떨어진 김부겸의 역사와,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 선택지가 봉쇄되었던 이 도시의 기억이 교차하는 16분 동안 시민들은 숨을 죽였다. 연설 막바지, 경기도 군포시 초선 시절부터 본인의 전화번호를 공개했다며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주는 대목에서야 청중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정치 떠나고 공직 관두면서 전화번호를 싹 다 바꿨으예. 여러분이 가진 번호는 제 옛 번호일 거라예. 자 적으이소. 제 번호는 010에···.” 그날 하루에만 그 전화기에 300여 통 전화가 쏟아졌다.
불과 2월까지만 해도 4개월 뒤 치러질 지방선거의 판세는 “TK 빼고”로 점쳐졌다. 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쪼그라든 국민의힘은 1년째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는 반면, 새로 들어선 이재명 정부의 국정운영 평가는 매주 고공 행진을 기록했다. 6·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절대우위가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대구와 경북만은 예외였다. 국민의힘 출마 후보를 찾기 힘든 다른 지역과 달리, 대구시장 자리에는 현직 의원에 전임 정부 방송통신위원장까지 9명이 몰려와 공천을 신청했다.
‘최대 격전지’라는 낯선 수식어
‘김부겸 출마설’이 무르익으며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다자 대결이든 양자 대결이든 국민의힘 후보를 오차범위 밖으로 따돌리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보수의 텃밭’ 대구에 ‘최대 격전지’라는 낯선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대구 시내에서 만난 한 택시 기사는 말했다. “내가 국힘 당원인데, 이번에는 국힘을 못 찍겠다. 여기는 너무 못하는데 반대로 (상대 당에서는) 너무 ‘괜찮은 후보’가 나와버렸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자 경북도당위원장인 임미애(59)는 지난해 가을부터 김부겸의 출마를 설득해왔다. 3월30일 출마선언 기자회견에서 김부겸 바로 옆에선 그가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자회견 후 질의응답에서 ‘험지 재출마 소회’를 묻는 질문에 김부겸은 콕 집어 임미애를 언급했다.
“임미애 도당위원장이 ‘형 혼자 잘 먹고 잘 사세요’ 이러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그러다가 제가 존경하는 이해찬 선배 빈소에서 참 선배들에게 많이 딲(닦)였습니다. ‘(대구 경북의 후배 정치인들) 모두 고생하는데 자네 혼자 따뜻하게 편히 살 수 있겠나, 압박도 넣고. 그러던 차에 크게 반대하던 가족들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셔서 이런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왕 결심한 이상 대구 시민들에게 확신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드려야 한다는 자세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4월21일 국회에서 만난 임미애는 조금 억울하다는 투였다. “나만 맨날 전화한 거 아니다. 전화 드린 사람들 되게 많았다.” 김부겸과 임미애의 인연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화운동 전력으로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던 김부겸은 아내 이유미씨와 대학가에 작은 서점을 열었다. 책값은 전부 외상으로 돌려놓고, 용돈까지 받아가는 후배들 탓에 거의 돈벌이가 되지 않던 서점에서 대학생 임미애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2012년, 경북 의성군의회에서 민주당 군의원을 지내던 그 앞에 ‘부게미(부겸이) 형’은 대구시 수성갑 국회의원 후보로 나타났다.
2012년 낙선한 김부겸은 일회성 출마일 거라는 의심을 깨고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 나와 또 낙선했다. 2016년 대구시 수성갑에 다시 출마해 민주당 후보로는 처음 대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기록을 썼지만, 2020년 총선에선 또 쓰라린 패배를 겪었다. 낙선이 정치인에게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TK의 민주당 후보란 얼마나 고된 자리인지 임미애가 모를 리 없다. 다섯 번째 대구 출마를 선언하는 김부겸 옆에서 눈물을 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협박성 독촉’에 김부겸이 출마를 결심했다는 세간의 얘기에 손을 내저으며 임미애는 말했다. “내가 드린 얘기는 별거 없다. 그냥 그렇게 말씀드렸다. ‘정치인으로서 본능적으로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선거, 그리고 지역이 강하게 총리님의 출마를 요구하고 있다는 거, 총리님의 역할이 있다는 거.’”
하여튼 그 ‘소명’이 문제였다. 이상헌(47)은 김부겸 민주당 대구시장 예비후보 캠프의 공보실장 2인 중 한 명이다. 2009년 경기도 군포시 지역구에서 3선 임기를 시작하던 김부겸 의원실에 비서관으로 국회에 발을 들였다. 2011년 늦가을쯤이던가. 김부겸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대구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군포에서 4선이 어렵지 않게 예견되던 민주당 중진의원의 느닷없는 ‘험지’ 출마 발표에 의원실 식구들의 반응은 “환호”였다. 어? 환호라고?
“당시 우리 당이 ‘노무현 정신’을 많이 얘기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역주의라는 벽을 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도전하는 모습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의원실 전 직원이 다 내려가서 선거를 뛰었다.”

그렇게 네 차례 대구 선거를 함께 치렀다. 의원이 자꾸 낙선을 하니, 2014년 대구시장 선거는 다른 의원실 보좌진으로 있으면서 파견 형태로 김부겸을 도왔고, 2016년 총선 때는 아예 원래 있던 의원실을 그만두고 대구 김부겸 캠프로 내려갔다. 지금도 이상헌의 공식 직함은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실 부실장이다. 한 원내대표의 허락을 구해 선거 기간 김부겸 캠프의 서울 쪽 공보를 총괄하고 있다. 여의도에서 흔한 일이냐고 묻자 이상헌은 웃으며 말했다. “일단 이렇게 여러 번 떨어진 정치인 자체가 별로 없지 않나.”
연어처럼 때가 되면 돌아가게 하는 힘이 김부겸에게는 있었다. 이상헌은 ‘낭만’이라는 단어를 썼다. “요즘 국회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동지적 관계’가 김부겸의 의원실에는 남아 있었다. 철 지난 낭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정치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 아닌가.” 이상헌만의 얘기가 아니다. 재야 시절부터 30년 넘게 함께했던 ‘왕 보좌관’ 이진수는 물론이고 김부겸 의원실 인턴으로 국회 경력을 시작해 이제 막 하나둘 선임 비서관 직책을 달고 있는 30대의 젊은 후배 그룹까지, 대구시 서구 두류네거리에 급하게 얻은 선거사무소에 속속 합류했다. “고난은 함께하되, 영광은 따로 한다”라는 ‘김부겸 사단’이 6년 만에 다시 모였다.
사실 다섯 번째 대구 선거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2022년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 임기를 마치며 김부겸은 정계에서 은퇴했다. 경기도 양평에 집을 구해 아내와 조용한 전원 생활에 들어갔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무늬만 은퇴’가 아니라 정치라는 평생의 과업을 내려놓는 퇴장이었다.
2020년 4월 총선은 김부겸에게도, 참모들에게도 큰 상처로 남았다. 이상헌의 말이다. “2016년 수성구에서 당선된 뒤에 의원님이랑 보좌진이랑 정말 열심히 했다. 대구의 숱한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4년간 손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실제로 한 것도 많다. 그런데 그동안의 선거 중에서 득표율이 제일 적게 나왔다. 10년 가까운 노력과 정성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서울로 운전해서 오는 길에 미친 놈처럼 소리 지르고 펑펑 울고···. ‘내가 다신 대구 안 간다’ 했다.”
“다리의 힘이 쭉 풀렸다고 하더라”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또 다른 참모의 말이다. “이번 출마 선언에서, 코로나19 초기에 대구에 지원금 1조원을 만들어 왔더니 “XX놈, 지 돈 갖다줬나, (나한테) 이캤잖아요!”라며 (당시 대구 시민의 반응을) 격하게 회상하는 게 화제가 되지 않았나. 그거 보면서 ‘아이고 저분 저 얘기 못하고 죽었으면 정말 한이 됐겠다’ 싶었다. 김부겸이 누굴 원망하거나 격하게 말하는 법이 거의 없는데 그 얘기는 여러 번 들었다. 그때 정말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고 하더라.” 30년 가까이 김부겸을 지켜본 한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김부겸이 대구를 버리고 양평으로 갔다는 둥 그런 말이 나오던데 사실은 반대다. 너무 진심을 다했던 도시라 대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던 거다.”
4월25일, 대구시 북구 엑스코 컨벤션센터 1층 간이 테이블. 정치 신인인 양 하루 대여섯 개씩 일정을 잡아 “후보를 굴리는” 캠프에 사정을 해 짧은 인터뷰 시간을 얻었다. 새벽 시장 유세를 마치고, 오전 9시30분 국제로타리클럽 행사장 앞에서 인사를 하다 내려온 후보는 아침도 거른 참이라고 했다. 김부겸에게 정치란 뭐길래 그를 다시 대구로 이끈 걸까.
역시 고 제정구 의원(1944~1999) 얘기가 나왔다. 김부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이름. 한국 빈민·철거민 운동의 선구자로 타고난 투사였지만, 정치에 입문해서는 분열보다 화합의 길을 걸었던 사람. 김부겸은 ‘제정구 선배’의 뒤를 밟으며 정치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양반 가슴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연대랄까 이런 걸 놓친 적이 없는데, 폐암 선고를 받고 돌아가실 무렵에 나한테 유언처럼 얘기를 하더라고. ‘21세기에는 상대편을 죽여서 내가 사는 정치라는 게 불가능할 거다. 상대편의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화해와 상생, 통합의 정치만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다.’ 그 뒤부터 ‘상생’이라는 게 내 정치의 화두가 되었는데, 뭐 당장 인기가 없었지. 매력이 없잖아.”
‘온건파’ ‘통합형’. 김부겸의 정치를 규정하는 이 단어들은 많은 날 강점이기보다는 약점이었다. 세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세게 말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참모들에게도 노상 불만 사항이었다. 단적인 예가 당내 선거다. 4선 국회의원에 행안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지낸 거물급 정치인이지만, 민주당 내 선거에서 김부겸이 거둔 최고의 성적은 2012년 꼴찌로 당선된 최고위원 자리가 전부다. 선명성 경쟁이 중요한 당내 선거에서 그는 경쟁력이 없는 후보였다. 원내대표 선거도, 당대표 선거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선을 긋고 각을 세워야 내 편이 만들어지는 정치의 세계에서 대화와 타협, 상생과 화합이라는 원칙이 손해 보는 장사라고 생각한 적은 없을까? 허허 웃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손해를 보지만 어떻게 해. 내 철학이나 비전을 바꿔서 할 수는 없잖아. 나는 나한테 맞는 옷을 입어야지. 내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지. 그래서 군포를 떠나 대구에 도전했고, 그렇게 두드렸더니 시민들이 기회를 주셨잖아. 그러니까 내 깃발을 내릴 수는 없지.”
고 제정구 의원의 유언과 달리, 21세기가 깊어질수록 강성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대결 구도와 적대의 언어가 정치권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아갔다. 6·3 지방선거 출마 선언과 동시에 김부겸이 불러온 열광은, 그래서 더 예상 밖의 일이다. 그는 시대의 조류와 정반대되는 종류의 말과 태도로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단순히 국민의힘 후보를 앞서는 지지율 때문만이 아니다. 캠프에서 빗자루질이라도 하겠다며 자원봉사자 지원이 물밀듯 들어오고, 후원 안내가 나간 날 당일, 은행 계좌 일일 한도를 넘어서는 후원금이 쇄도했다.
4월24일 오후, 대구시 서구 두류네거리 선거사무소에서 만난 김부겸 캠프 홍보실장 남가희(33)는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쏟아지는 성원에 비결을 묻자 “그동안 쌓은 덕이 이제 빛을 발하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는 최대 단점이라고 했던 온건함이 완전히 반전되어 강점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해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얘기를 하는 측면은 업그레이드되었지만, 김부겸의 ‘슴슴함’은 내가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2014년 대구시장 선거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마라맛’에 질린 사람들이 김부겸을 ‘재발견’한 것 아닐까.” 민주당 소속 한 의원실의 선임 비서관이기도 한 남가희에게, 응원의 말을 전하는 국민의힘 보좌진이 적지 않다. 계엄을 기점으로 더더욱 삭막해진 국회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캠프 입장에서 ‘김부겸의 인생’이 이번 선거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대구’라는 도시 그 자체이다. 통상 선거라면 따져볼 상대 후보의 경쟁력이나 구도는 상대적으로 후순위이다. 캠프 대변인 백수범의 말이다. “‘지금 대구에 필요한 사람은, 대구가 씨를 뿌려 열매로 익혀낸 김부겸이고, 대구의 재도약을 김부겸의 마지막 사명으로 삼겠다’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다.”
김부겸 캠프는 이틀에 한 번꼴로 공약 발표회를 연다. 선거사무소에 설치된 대형 LED 앞에서 헤드 마이크를 낀 후보가 두 손을 다 사용하며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정치꾼으로서는 별로 노련하지 못하지만 일 하나만은 제대로 해왔다”는 김부겸의 삶을 각인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정부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당 후보’라는 것도 전면에 내세운다. 김부겸은 4월23일 두 번째 공약 발표회에서 8년째 제자리에 멈춰 있는 TK통합신공항의 이전과 착공을 위해 “1조원을 확보하기로 당과 협의를 마쳤다”라고 밝혔다.
김부겸은 ‘신공항 문제 해결’을 우선적으로 약속한 이유에 대해 〈시사IN〉에 이렇게 말했다. “신공항은 단순히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 아니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수십 년째 도시가 가라앉고 있는데 그것조차도 돌파를 못하면 어떻게 지역 소멸이라는 물길을 돌리겠나. 자신감을 잃어버린 대구 시민들에게 ‘아닙니다, 우리 대구 해낼 수 있습니다’ 보여줘야 한다.”
대구 민심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조짐은 여기저기서 보고된다. ‘보수의 심장’이라는 자부심과 향수를 유지하기에 국민의힘의 지금 모습이 실망스러운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도시의 쇠락이 매우 뚜렷하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최하위인 지역내총생산(GRDP), 갈수록 심화되는 청년 인구 유출, 대구 최대 상권이라는 동성로까지 잠식해가는 상가 공실 등. 장기간 무기력에 빠져든 도시는 김부겸이든 무엇이든 변화하자는 쪽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 형편이다.
“국힘이든 민주당이든 당은 상관없다”
4월24일, 대구시 북구 3공단. 대구의 전통 제조 산업인 안경 공장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김부겸은 오전 11시 이곳에 있는 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에서 ‘안경산업 정책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신정화 동영아이옵티컬 대표는 “30년째 업체를 운영하는데 선거 때 이곳을 찾은 사람은 처음”이라며 “김부겸을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대구 분위기는 중앙과 협의해 대구에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뽑자는 거다. 국힘이든, 민주당이든 당은 상관없다.”

이튿날 오후 찾은 대구시 중구 동성로에서는 김부겸과 사진을 찍으려는 시민들이 모여들어 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특히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의 사진 촬영 요청이 많았다. 열다섯 살, 일곱 살 두 아이와 함께 나온 이석주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선 바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원래 지지자가 아니었는데 김부겸을 찍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저도 그런 사람인데 이번 출마 소식을 듣고 많이 기뻤다. 이제 대구에도 변화가 생길까 싶은 거다.”
이번에야말로 대구가 ‘디비지는’ 걸까? 20년 넘게 대구 지역의 진보운동에 몸담아온 한 인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표면의 분위기로 대구의 선거 결과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구는 동별 기초 단위까지 국민의힘 조직이 촘촘하게 뿌리 내린 지역이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본격적으로 선거전이 시작되면 그 사람들은 전쟁이 따로 없다.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어르신들까지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표를 모은다.”
대구가 고향인 하헌기 민주당 전 상근부대변인은 대구 선거에 특수성이 있다고 말했다. 기존 지지층을 결집하고 중도층을 잡으면 이기는 것이 대부분 선거의 공식이다. 대구는 다르다. 반대하는 사람까지 ‘돌려세워야’ 50%를 넘길 수 있다. “국민의힘 후보(추경호)가 확정되었으니 아마 그쪽 지지율이 올라갈 거다. 대구라는 데가 느슨하게 있다가도 순식간에 뭉치는 특성이 있다. 중앙 언론에 비춰지듯이 쉽게 낙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하헌기).” 4월29일, 실제로 국민의힘 후보 추경호와 김부겸이 오차 범위 내에서 경합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매일신문〉이 의뢰해 한길리서치가 4월27일~28일 무선 ARS방식으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김부겸은 42.6%, 추경호는 46.1%로 초접전 양상을 보였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식단에서 미역국도 끊고, 기자들의 연락도 차단한 채 캠프 기획본부장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김부겸 사단의 ‘왕 보좌관’ 이진수는 3월 초 온라인 매체 ‘피렌체의 식탁’에 기고한 글에서 대구의 민심을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 빗대었다. “욕하는 것만 보고 그 팬이 응원팀을 바꾸리라 기대하면 안 됩니다. 하도 못 이기니, 제발 좀 정신 차려서 이기라고 욕하는 겁니다. (…) 광주가 민주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만큼 대구는 보수를 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진수는 ‘30년 동지가 보는 김부겸의 대구 출마’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그래서 김부겸은?’이라고 묻고 싶으실 텐데,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정치인의 소명 의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2014년 6월, 첫 번째 대구시장 선거 낙선 이후 김부겸은 〈시사IN〉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기회, 인재, 돈은 전부 서울로 빨려가고 지방은 정말 피폐하다. 그런데 본질이 지역 갈등이라고 착각하도록 부추기는 게 정치하는 사람들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서민이 뭐가 차이가 있나. 똑같은 요구를 해야 한다. 사실 이거야말로 ‘서울공화국’의 분할 통치다(〈시사IN〉 제353호 ‘대구나 전라도나 서민은 같다’ 기사 참조).”
12년이 지난 올해 3월30일 대구시장 선거 출마선언문에서도 김부겸은 “지역주의보다 더 높은 벽, 지역 소멸이라는 절망의 벽”을 넘겠다고 말했다. 그때보다 그 벽은 높아졌지만 벽의 높이를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2012년 총선부터 셈하면 14년간의 두드림이다. 기나긴 두드림 끝에 김부겸의 소명은 벽을 부술 수 있을까.
대구·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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