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126> 비포 선라이즈] 연애의 정석, 사랑의 탄생, '티키타카'

어떤 인연은 우연이란 가면을 쓰고 운명의 심장부로 성큼 걸어 들어온다. 생면부지의 두 남녀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눈을 맞추고, 단 몇 시간의 대화만으로 서로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그 기적 같은 찰나를 포착한 연애의 정석이자 인간이 인간에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유려한 소통의 궤적을 보여준다.
파리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 어느 중년 부부가 격렬한 말다툼을 하고 셀린은 소란을 피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여행 중이던 미국인 청년 제시는 옆자리에 온 셀린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부부가 싸우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문을 튼다. 무슨 책을 읽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 그들의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에 이르는 드넓은 대화의 바다로 나아간다.

축구에서 공을 짧고 정확하게 주고받으며 흐름을 만드는 패스를 뜻하는 스페인어 ‘티키타카(tiki-taka)’는 원래 탁구공이 똑딱똑딱, 오가는 모양을 표현한 의성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티키타카가 있다. 내가 던진 말이 허공에 떨어지지 않고 상대의 마음에 닿을 때, 내가 던진 농담과 질문이 상대의 미소를 불러오고 생각지 못한 대답과 더 깊은 물음이 되어 날아올 때 두 사람은 즐거움과 친밀감을 느낀다. 심지어 말이 잠시 멈추는 간격조차 대화가 되고 침묵마저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바란다. ‘아, 이 사람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그래서였다. 빈에서 내리려던 제시가 말한다. “너랑 더 말하고 싶어. 우리 통하는 거 맞지? 내일 아침, 내가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함께 이 도시를 걷지 않을래?” 잠시 나눈 대화 속에서 믿음이 생기고 설렘을 느낀 셀린은 파리까지 가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기차에서 내린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룻밤, 빈의 거리와 카페, 공원과 강변을 걸으며 끝없이 대화한다.
지적 수준과 문화적 취향,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대를 만날 때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자아가 깨어난다.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 상대의 입을 열고 날아올 때 우리는 타인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제시와 셀린도 대화를 나누는 내내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말이 통하고 언어의 온도가 비슷하고 영혼의 주파수가 같기 때문이다.
“우리 진실게임 하자.” 제시와 셀린은 서로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선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만큼 신나는일이 또 있을까. 더 대화하고 싶은 바람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애착으로 번지고, 마침내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갈망으로 수렴된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인간은 비로소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 타인이라는 대지에 상륙한다. “마치 꿈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야.” 제시가 말한다. “난 네 꿈속에, 넌 내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셀린이 말한다. 그들은 서로의 문장이 빈틈없이 맞물리는 황홀한 언어의 유희 속에서 그 완벽한 정서적 합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의 본질은 더 말하고 싶다, 지금처럼 함께 이야기하며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사람과 내일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과 오래오래 이야기하고 웃으며 함께 늙어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제시와 셀린은 차마 소리 내 묻지 못한다. 미국과 프랑스라는 현실의 거리도 그들을 가로막는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고 둘은 아쉬움을 감춘 채 막연히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길로 떠난다.

제시와 셀린은 다시 만나 행복한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의 관계를 점화시킨 도화선은 기차 안에서 목격한 부부 싸움이었다. 제시와 셀린은 부부가 왜 다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그 부부도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서로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환해졌던 시절,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웃고,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궁금해하며 세상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어느덧 사랑을 지치게 했다. 생활은 낭만을 갉아먹고, 반복되는 현실은 그들의 입과 귀를 막아버렸다.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셀린과 제시 역시 함께 시간을 항해하는 사이 익숙함에 침식된다면, 서로를 향해 날 선 언어를 퍼붓는 중년 부부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과 사랑의 신비는 열정이 차갑게 식어 단단한 화석이 된 후에도 지속된다는 데 있다. 한때 눈동자 속에 비친 서로의 모습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눈부신 티키타카의 기억은 권태의 폭풍우를 견디게 하는 단단한 뿌리가 된다.
결국 사랑이란, 가장 뜨거웠던 시절의 언어를 밑천 삼아 인생의 시린 겨울을 함께 건너가는 일이다. 비록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를 할퀴는 날이 올지라도 ‘우리가 그토록 마음이 통하던 때가 있었지’라는 기억 한 자락을 공유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대화의 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 세월이 서로를 상처 입히고 심장을 차갑게 식힌다 해도 돌아서지 않고 다시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이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것, 서로의 늙어감을 연민하며 여전히 말이 통하는 상대로 남으려는 노력. 그것이 바로 연애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삶이라는 이름의 진짜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는 여행자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와 마음에 닿는 문장을 주고받는 경이로운 축복처럼, 사랑의 본질은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라 나의 서사와 당신의 서사가 만나 하나의 완전한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 있다.

사랑은 대화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건 눈빛과 침묵, 질문과 답을 ‘틱톡틱톡’ 주고받는 일이다. 셀린과 제시가 밤을 지새우며 생각과 문장과 인생을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누군가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생의 결핍을 채워간다. 그 깊은 언어의 교환이 평생을 지탱하는 빛이 된다.
오늘 당신 곁에는 어떤 대화 상대가 있는가. 당신은 지금도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가. 그 사람과 마지막으로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대화한 날은 언제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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