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배운 여자라는 평생 한 풀어… 선생님 덕분에 당당히 살았다”

오주비 기자 2026. 5. 1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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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재 일성여중고 교장 별세
63년간 6만명 넘는 졸업생 배출

“‘못 배운 여자’라는 가슴에 평생 맺힌 한을 풀어준 분 아니겠습니까.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제는 당당하게 살아요.”

11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선재 일성여자중고등학교 교장 빈소에서 졸업생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연합뉴스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故) 이선재(90) 일성여자중고 교장의 제자 고금자(67)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2년제 학력 인정 평생학교인 일성여자중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성인 여성들이 중·고교 과정을 공부하는 곳이다. 2022년 이 학교를 졸업한 고씨는 “배우지 못한 사실을 평생 감추고 살며 주눅이 들었던 저를 고개 들고 살게 해준 분”이라며 “졸업 후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가르침대로 베풀고 살기 위해 사회복지관에서 노인 심리 상담을 하고 있다”고 했다.

1936년 개성에서 태어난 이 교장은 6·25전쟁 중 1·4 후퇴 때 서울로 피란을 왔다. 당시 이웃들 도움으로 대학을 어렵게 졸업한 그는 자신도 베풀고 살겠다는 마음에 1960년 야학을 열었다. 그러던 중 피란민 자녀들을 가르치던 일성고등공민학교가 건물 월세를 못 내 쫓겨났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지인들과 함께 애를 써 폐교를 막았다. 이렇게 1963년 일성학교와 연을 맺었고, 지금껏 6만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날 빈소에는 머리가 희끗한 일성여자중고 졸업생 10여명이 찾아와 조의를 표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릴 것을 우려해 학생들에겐 부고를 이날 저녁 뒤늦게 알렸는데, 미리 소식을 알음알음 전해 들은 졸업생들이 단번에 달려온 것이다. 졸업생 진정순(68)씨는 이 교장의 영정 사진 앞에서 헌화를 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진씨는 “공부뿐만 아니라 인생을 가르쳐준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고 했다. 졸업생 권정화(67)씨는 “선생님이 늘 저희에게 ‘만학도라고 포기하지 말고 하늘나라 가기 전까지 같이 공부하자’고 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조현분(59) 일성여자중고 교무부장은 “교장 선생님이 늘 ‘가족을 위해 희생한 여자들이 본인 인생과 꿈을 위해 살아볼 기회를 주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2024년 2월 졸업식에서 이선재 교장과 학생들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는 모습. /일성여자중고등학교

1960년대만 해도 이 학교에는 학비 낼 형편이 안 되는 어린 학생이 많았다. 그러다 1970년대부터 구로공단 여공들과 젊은 주부들이 글을 배우고 싶다며 몰렸다. 지금은 과거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중장년층 주부와 한글조차 배울 기회가 없었던 어르신 학생이 많다. 지난 2월에도 87세 어르신 등 중학생 240명, 고등학생 265명이 입학했다. 매년 수능 때마다 ‘최고령 응시자’를 배출하는 곳도 이 학교다. 졸업생 중엔 박사 학위를 딴 이도 있고, 시인으로 등단한 졸업생만 12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장이 별세하며 이 학교는 올해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2028년 2월엔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처했다. 2007년 평생교육법이 개정되면서 학교·재단 법인만 평생교육 시설 설립 주체로 인정하기 때문에 2007년 이전 설립된 시설은 설립자가 물러나면 설립 주체를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 법인으로 전환하려면 시설 등 여러 조건을 갖춰야 하는데, 평생 못 배운 이를 위해 봉사한 그에게 시설 확장 등에 투자할 여력은 없었다.

일성여자중고 관계자는 “생전 교장 선생님이 학교를 살리려고 여러 기관과 정치인을 찾아다니며 애썼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못 찾았다”면서 “교직원들이 학교를 유지할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보겠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교장의 유족으로는 아들 이원준(세종대 교수)·이혁준(일성여자중고 행정실장)씨, 딸 이승은씨, 사위 김성실(전남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은 13일 오전 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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