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회피’… 39년 만의 개헌 좌초

손경호기자 2026. 5. 1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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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호 서울취재본부장/정치학 박사

'87년 체제' 극복을 위한 개헌 시도가 좌초됐다. 40년 된 낡은 옷을 벗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내라는 국민적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국민투표로 가기도 전에 초라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

이번 개헌안 좌초 사태와 관련해 누구 책임이 더 클까. 결론부터 말하면 일차적 책임은 과반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이차적 책임은 표결 불참으로 대응한 국민의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는 한국 정치 전반에 만연한 합의제 민주주의 붕괴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이다.

헌법 개정은 일반 법률안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헌법은 다수의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문서가 아니라, 국가 공동체의 최소 합의를 담는 최고 규범이다. 헌법이 개정 요건으로 국회 재적 3분의 2 찬성을 요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과반 의석을 가진 집권 세력임에도 야당 설득보다 속도전에 치중했다. 제1야당과의 진지한 협상과 설득보다는 '속도전'과 '여론 몰이'에 치중했다. "시대적 요구", "역사적 기회"라는 구호는 넘쳤지만, 정작 협상력은 보이지 않았다. 계엄권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 지방 균형발전 등 개헌안의 명분은 충분했다. 그러나 내용이 아무리 옳다고 주장해도, 야당의 합의를 얻지 못하면서 '말짱 도루묵'이 됐다.

1987년 개헌은 거리의 민주화 요구만으로 되지 않았다. 여야가 극한 대치 속에서도 직선제와 권력구조를 두고 협상했고, 최소한의 공감대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반면 1972년 유신헌법, 1980년 8차 개헌은 권력자가 밀어붙인 일방 개헌이었다. 결과는 어땠나. 국민적 정통성을 얻지 못한 채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이번 민주당식 개헌 드라이브가 위험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헌법은 목적이 선하다고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정치 상품이 아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 역시 비판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 개헌안 투표에 집단 불참하여 '투표 불성립'을 유도하고, 민생 법안까지 인질 삼아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행태는 공당으로서 무책임의 극치다. 국민의힘은 '졸속 개헌'을 반대한다고 주장하지만, 진정으로 개헌의 의지가 있었다면 대안을 제시하고 치열하게 토론했어야 한다.

불법 계엄 방지책이나 자치분권 강화 등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의제들조차 오직 선거의 유불리에 따라 '정치 공세'로 치부하며 논의 자체를 거부한 것은 전략적 보이콧을 넘어선 직무 유기다. 39년 만의 개헌 기회를 발로 차버린 국민의힘의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는 이번 사태의 이차적 책임을 지기에 충분하다. 결국 민주당은 숫자를 믿고 오만했고, 국민의힘은 책임 있는 반대 대신 회피를 택했다. 한쪽은 다수의 횡포, 다른 한쪽은 소수의 방해인 셈이다.

우리는 과거 1987년 9차 개헌의 기억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명운보다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우선시했다.

하지만 2026년의 국회는 어떠한가. 87년의 선배들이 '타협의 미학'을 보여줬다면, 지금의 후예들은 '증오의 정치'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처럼 상대를 '위헌 정당'이라 비난하고, 국회의장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 조롱하는 수준의 정치 문화로는 단 한 글자의 헌법도 고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정치권은 이번 개헌 불발을 단순한 '정치적 무승부'로 여겨선 안 된다. 이는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명백한 배신행위다. 민주당은 거대 의석이 곧 '독점적 면죄부'가 아님을 깨닫고 의회 독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의힘 또한 '발목 잡기' 식의 소극적 야당 행보가 국민의 외면을 부를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헌법은 정치인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낡은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화국을 설계하라는 시대적 명령을 정쟁의 소지로 전락시킨 이들에게 역사는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손경호 서울취재본부장/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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