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는 함께 짓는데, 사업자 통장은 남편 이름
농산물 출하와 판매대금은 남편 이름으로
공동경영주 등록해도 정책자금 신청은 어려워
“가부장적 농촌사회와 행정제도 손봐야”

진주 금산면 한 시설농장 안. 챙 넓은 밀짚모자를 눌러쓴 이연록(60) 씨가 고추나무 사이로 몸을 숙였다. 초록 잎 사이를 헤집고 익은 고추를 골라냈다. 천장 아래로 햇빛이 내리비쳤고, 안쪽 공기는 30℃까지 달아올랐다. 시설 안에는 이 씨뿐이었다. 그의 손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 씨의 하루는 이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된다. 농장에 나오기 전 남편의 아침밥부터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밥상을 차리고 집안일을 챙긴 뒤에야 시설로 향한다. 농사일은 시설 안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씨에게 하루 노동은 집에서 이미 시작된 셈이다.
지금은 고추 수확 철이다. 이 씨가 짓는 고추농사는 지난해 9월 초 정식(옮겨심기)해 올해 7월께까지 이어진다. 오전 6시 30분 농장에 나오면 먼저 정리 작업을 한다. 밤사이 작물을 덮었던 보온 덮개를 걷고, 고추나무 상태를 살핀다. 병든 잎은 없는지, 약을 쳐야 할 곳은 없는지, 어느 동부터 수확할지 확인한다. 이 준비에만 1시간가량 걸린다.
정리 작업이 끝나면 곧바로 수확이 이어진다. 이 씨는 오후 5시까지 하우스 안에서 고추를 딴다. 하우스는 4동, 2000평(6617㎡) 규모다.
하루 평균 수확량은 500㎏가량이다. 수확한 고추가 쌓이면 다시 선별 작업이 시작된다. 고추는 컨베이어 위에 올라가고, 이 씨는 상품으로 낼 고추와 그렇지 않은 고추를 골라낸다. 병든 것, 상처 난 것, 모양이 고르지 않은 것을 빼낸다. 수확은 여럿이 해도 선별은 그의 손을 거친다. 선별한 고추를 10㎏ 종이상자에 담아 출하 준비까지 마치면 해가 저문다.
남편은 수확한 고추를 옮기거나 큰 농기계를 다루는 일을 맡는다. 그러나 반복되는 손작업과 선별, 인부 챙기기, 식사 준비는 이 씨에게 집중된다. 농사일 중 무엇을 맡느냐는 질문에 이 씨가 "전부 다"라고 답한 이유다.

같이 짓는 농사, 따로 가는 권한
그렇다면 이 씨는 농업경영의 주체로 인정받고 있을까. 이 질문 앞에서 그는 출하 명의와 통장을 먼저 말했다. 이 씨는 "같이 농사를 짓고 같이 수확하지만 출하는 남자 이름으로 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판매 대금이 남편 명의 통장으로 들어가면 여성농민은 생활비를 따로 요청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농림축산식품부 공동경영주 제도도 이 간극을 충분히 메우지 못한다. 이 씨는 공동경영주로 등록돼 있지만, 시설을 키우려고 농업시설자금 지원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신청이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는 2월 자신의 이름으로 신청하려 했으나 남편 동행이 필요하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했다.
이 씨는 "저도 재산이 있고 20년 넘게 농사를 지었는데 왜 안 되느냐고 물었지만, 경영자만 신청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농업경영체 등록에서 경영주는 농가를 대표해 등록된 사람으로, 각종 융자·보조사업 신청 등 행정 절차에서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동경영주는 경영주의 배우자인 여성농업인을 경영 주체로 인정하고 제도적 지위를 보장하고자 2016년 도입된 제도다. 공동경영주로 등록하는 경우 농업인 수당, 복지바우처 등 다양한 정책의 지원 대상이 된다.

가부장적 농촌 사회 바꿔야
윤소영 경남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이 문제를 가부장적인 농촌 문화와 행정 제도가 맞물린 구조로 봤다. 윤 대표는 "지역 공동체 규모가 작고 산업 구조가 단순할수록 전통적인 성별 역할이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밖에서 농사짓는 사람, 집 안에서 가사를 하는 사람이라는 구분이 반복되면서 여성농민을 보조 역할로 보는 인식이 강화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제 농업 구조는 이미 달라졌다고 짚었다. 논농사 중심에서 하우스·밭작물 농사가 늘어나면서 누가 주된 경영자이고 누가 보조자인지 나누기 어려운 농가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은 여전히 농가 대표 한 사람을 중심으로 정책을 설계한다.
윤 대표는 "농업 지원금을 한 가구 한 사람에게 주는 방식은 누군가를 대표로 만들 수밖에 없고, 결국 남성을 앞세우게 된다"며 "농사를 함께 짓는 사람이 둘이면 각각의 농업인으로 등록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