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 너머 5·18] ②1980년 대구·경북 무슨 일 있었나: ‘보수의 심장’ 대구·경북, 민주화 운동 성지였다
3개 학교 연합 시위 반유신 여론↑
광주 진실 알리던 ‘두레양서조합’
대구 민주화 가치 아래 달빛 연대

1979. 05.05
'보수텃밭' 대구, 70년대 민주운동 중심지
지금은 '보수의 심장'으로 상징되는 대구·경북 지역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톨릭농민회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던 민주화 운동 발원지였다.
특히 1979년 발생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은 농민들의 권리 찾기 운동을 한국 천주교와 유신 정권 간의 전면적인 충돌로 번져, 부마항쟁과 10·26 사태로 이어지는 유신 종말의 결정적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건은 1978년 경북 영양군 농민들은 행정기관과 농협 권장 씨감자의 불량으로 농사를 망치자, 가톨릭농민회와 함께 실태 조사 및 보상을 요구하며 시작됐다.
이듬해 보상 운동을 주도하던 오원춘 분회장이 20일간 실종된 후 중앙정보부의 납치·감금 테러 사실을 폭로해 사태는 인권 문제로 급격히 확산됐다.
이에 천주교 안동교구는 '짓밟히는 농민운동' 문건을 제작,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통해 정권의 폭거를 전국에 알리며 유신 퇴진 운동의 도화선을 당겼다.


1979.09.04
대학가 중심 민주화 요구 확산 '활활'
1979년 9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는 YH 무역 사건의 유혈 진압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전례 없는 정치 탄압으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도 대구에선 경북대와 계명대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출자해 설립한 양서조합이 활발히 활동했다. 조합이 운영했던 서점은 당시 금서였던 사회인문 서적을 보급하며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거점이자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경북대 학생들이 주축이 된 '두레서점'과 계명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영됐던 '한양서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서점에서 교류하던 경북대·영남대·계명대 학생들은 마침내 '사회정의를 위한 경북학생협의회'(이하 협의회)를 결성하고 연합시위를 도모했다.
협의회는 YH사태의 진상규명, 노동3권의 유보 조항 철폐, 유신헌법 철폐, 구속 민주 인사 석방 및 강제 휴학·강제 입영의 중지, 학내 모든 경찰 요원 추방 등 6개 항의 결의 사항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했다.

1980.05
계명대, 전국 최초 '무기한 휴교령'
당시 신군부는 1980년 5월 15일 전국 최초로 계명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도화선은 5월14일 대구의 격렬한 학생 시위였다.
80년 5월 대구에선 비상계엄 해제, 유신 잔재세력 퇴진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5월 14일에는 대구의 각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1만 5천 여명 이상이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학교를 지나 서문시장과 대구백화점 등 도심에서 비상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친다. 체포 과정에서 학생들은 군인들에 의해 군화로 짓밟히고, 곤봉 무차별적 구타를 당했다. 이날 대구백화점 앞 시위로 체포된 계명대학교 학생 400여 명은 육군 제50사단(계엄사)으로 이송 수용됐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다음 날인 15일, 계명대에선 전국 최초로 무기한 휴교령이 선포됐다.

1980.09.11
달빛동맹 두레양서조합 사건
계명대에 휴교령이 내려졌던 5월 15일, 대구와 거창 지역의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광주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함평 고구마 사건 진상보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행사는 무산됐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농민회원들이 광주의 참상을 두레양서조합 회원들에게 전했다. 마침내 이들은 고립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두레양서조합원들은 광주 항쟁의 실상을 전파하기 위해 '대구시민에게 알립니다'라는 제목의 유인물 5천부를 제작하고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다.
하지만 27일 계엄군의 무력 진압 소식이 전해지며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계획은 전격 취소됐고 제작된 유인물은 보안을 위해 소각됐다. 같은 해 9월 두레서점 급습과 경찰의 연행이 시작됐고, 조합원들은 조사과정에서 고문 피해와 '빨갱이 낙인' 등 사회적 후유증에 시달린다. 이 사건은 광주와 대구가 민주화라는 가치 아래 연대한 초기 '달빛동맹'의 실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대구/김다란 기자 kdr@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