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자 가족’은 어디까지 죄인인가…벼랑 끝에 선 모성의 딜레마

노정연 기자 2026. 5. 1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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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어머니 비춘 연극 ‘그의 어머니’
연극 <그의 어머니>의 공연 장면. 배우 진서연이 성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어머니 ‘브랜다’ 역을 연기한다. 국립극단 제공

막이 오른 무대 위, 싱글맘 ‘브랜다’(진서연)는 아이들의 아침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게임기를 손에 쥔 채 ‘레벨업’을 자랑하는 8살 아들 ‘제이슨’(최자운)은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지만,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기에 엄마는 할 일이 많다. 아이를 달래 아침을 먹이고 옷을 입혀 문밖으로 내보낸 후에야 찾아온 잠깐의 고요, 브랜다는 수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평범한 아침을 보내는 듯한 이 가족은 사실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브랜다의 17살 아들 ‘매튜’(최호재)는 하룻밤 사이에 세 여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가택연금 중이다. 집 밖엔 매튜를 찾아온 취재진과 범죄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진을 치고, 조금이라도 문이 열리면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듯 날카로운 카메라 플래시가 문틈을 파고든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그의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성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게 된 한 가족의 벼랑 끝 일상을 비춘다. 캐나다 출신의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2010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 각종 희곡상을 휩쓴 작품이다. 국내에는 류주연의 연출로 지난해 처음 소개된 뒤 올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연극 <그의 어머니>의 공연 장면. 작품은 성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게 된 한 가족의 벼랑 끝 일상을 비춘다. 국립극단 제공

이 지옥 같은 상황의 주인공은 어머니 브랜다다. 작품은 매튜가 저지른 범죄의 전말이나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에서 벗어나, 죄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가해자 가족,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세상은 가해자 가족을 가해자와 동일시하며 거리낌 없이 돌을 던지고 어머니는 그 돌을 온몸으로 맞으며 아들을 지키려 고군분투한다.

“첫 공판에서 잠깐 동안 그 애들이 미웠어.(…)미워야 할 사람은 내 아들인데, 근데 나는 그 여자애들이 미웠어. 난 매튜가 한 행동을 증오해. 근데 매튜는 미워할 수가 없어. 그게 자식의 저주야.”

브랜다의 절규는 작품을 관통하는 뼈대다. 그는 아들이 저지른 악행에 경악하고 치미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미성년자인 아들이 성인 법정에 서는 것만은 막으려 애쓴다. 성인으로 재판을 받게 되면 매튜의 형량은 수십 년으로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사랑과 실존적인 혐오가 뒤엉킨 감정 속에서 브랜다는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 “내 아들은 내가 가장 잘 안다”며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던 그는, 의지와 다르게 흘러가는 현실 앞에서 무너져내린다.

연극 <그의 어머니>의 공연 장면. 작품은 성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게 된 한 가족의 벼랑 끝 일상을 비춘다. 국립극단 제공
연극 <그의 어머니>의 공연 장면. 작품은 성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게 된 한 가족의 벼랑 끝 일상을 비춘다. 국립극단 제공

배우 진서연은 극한을 오르내리는 브랜다의 위태로운 감정과 울분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쏟아낸다. 본인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힘든 톱3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을 만큼, 영혼의 밑바닥까지 무대 위에 발가벗겨져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는 연기다. 가해자 가족이 자칫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도록 경계했다는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가해자의 감정을 헤아려주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면서도 “브랜다를 연기하며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가족일 수 있다는 걸, 어떤 말 못 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털어놨다.

양가감정을 느끼는 건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론 냉정한 척하지만 미숙하게 흔들리고, 때론 이기적인 바닥을 드러내는 브랜다를 비난하다가도 연민을 느끼고, 이해하려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는 딜레마를 겪는다.

연극 <그의 어머니>의 공연 장면. 작품은 성범죄자의 가족이라는 굴레를 쓰게 된 한 가족의 벼랑 끝 일상을 비춘다. 국립극단 제공

작품이 무엇보다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낸 범죄자 가족의 삶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해자의 가족에게 예전 같은 일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능한 건축 디자이너인 브랜다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을 잃고 ‘성폭행범의 어머니’로 낙인찍힌다. 가해자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공격과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형을 여전히 다정하게 따르는 천진난만한 제이슨의 모습 역시 관객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연극 <그의 어머니> 원작자 에반 플레이시가 지난달 27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라운드 인터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국립극단 제공

최근 한국을 찾은 에반 플레이시는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누군가를 변호하거나 용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우리가 쉽게 외면하는 사람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해자의 가족은 또 다른 가해자인가, 아니면 사건에 휩쓸린 피해자인가. 우리는 그들을 어디까지 비난할 수 있고,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의 어머니>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관객 앞에 남긴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7일까지 공연된다. 14세 이상 관람가.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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