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에 녹는 퇴직연금…'원금 보장' 대신 ‘수익률 전쟁’ 택한 보험사들
인플레 먼저 겪은 日, 원리금보장 4년새 15%p↓…투자형 전환 뚜렷

물가 상승이 장기화되면서 퇴직연금 운용이 원금 사수에만 매몰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예·적금 위주의 원리금보장형 상품만으로는 장기적인 실질 구매력 방어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보험업계는 타깃데이트펀드(TDF)와 디폴트옵션을 중심으로 투자형 자산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디폴트옵션 도입 이후 수익률 차별화가 뚜렷해지자, 국내 보험사들은 글로벌 자산배분과 로보어드바이저 운용 역량을 앞세워 가입자 확보를 위한 본격적인 수익률 경쟁에 돌입하는 모습이다.
10일 금융감독원과 고용노동부의 ‘2025년 퇴직연금 적립 및 운용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495조6347억원으로 집계됐다.
다만 적립금 대부분은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전체 퇴직연금의 약 70% 안팎이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운용되고 있다. 과거 80%대까지 치솟았던 때보다는 비중이 다소 낮아졌지만, 여전히 퇴직연금 자산이 안전자산에 편중돼 있다는 의미다.
디폴트옵션 역시 안정형 쏠림이 이어졌다. 지난해 말 기준 디폴트옵션 적립금의 85.4%가 정기예금 중심 안정형 상품에 집중됐다. 안정형 수익률은 2.63%에 그친 반면 적극투자형은 14.93%를 기록했다. 물가 상승률과 세금 등을 감안하면 원리금보장형 상품만으로는 실질 수익률 방어가 쉽지 않다는 평가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보험사들은 TDF와 디폴트옵션 등 투자형 퇴직연금 상품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보험사들은 단순 원금보장형보다 장기 수익률 경쟁력을 앞세워 가입자 확보에 나서는 분위기다.
교보생명은 ETF 기반 자산배분과 로보어드바이저 중심 운용 전략을 강화하며 올해 1분기 기준 DC형 원리금비보장 상품 1년 수익률 26.15%를 기록했다. 삼성생명도 같은 기간 DC형 원리금비보장 수익률 25.17%를 기록하며 글로벌 자산배분형 TDF 확대에 나섰다.
한화생명은 디폴트옵션 경쟁력 강화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특히 ‘한화생명 디폴트옵션 중립투자형 BF1’은 최근 3년 누적 수익률 53.93%를 기록하며 전체 사업자 가운데 1위에 올랐다.
이같은 흐름은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일본 DC형 퇴직연금 내 원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2021년 45.3%에서 2025년 30.8%로 하락했다. 반면 외국주식 비중은 같은 기간 12.4%에서 25.2%로 확대됐다. 물가 상승 장기화 이후 실질 수익률 확보 수요가 커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다만 투자형 퇴직연금 확대 과정에서 가입자 교육과 손실 리스크 관리 필요성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가입자 본인의 연령과 은퇴 시점, 위험 성향 등을 고려해 원리금보장형과 투자형 상품 비중을 조정하는 자산배분 전략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디폴트옵션 선택 과정에서 상품 구조와 위험 수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손실이 확대될 수 있는 만큼, 사업자와 당국의 금융 교육·정보 제공 강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투자형 퇴직연금은 단기 수익률보다 장기 분산투자와 자산배분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상품”이라며 “향후에는 단순 원금 보장보다 실질 자산 형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점차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홍승해 기자 hae810@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