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놈 죽이자”로 즉각 처형. 공산당 인민재판의 기록 [호준석의 역사전쟁]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은 1925년 결성된 좌파 예술가 단체입니다. 카프의 쌍두마차가 김기진, 박영희입니다. 아호가 ‘팔봉’이어서 김팔봉으로 더 많이 불린 김기진은 1935년 좌익 문학계에서 이탈했고, 6·25전쟁 당시에는 작가가 아닌 인쇄소 경영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김팔봉은 참혹한 인민재판의 피해자가 됩니다. 이 기록을 처음 읽었을 때는 ‘설마 이게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참극인데, 여러 목격자의 진술, 당시 재판 기록, 언론 보도가 모두 이 참극이 실제 상황이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6·25 남침 후 미처 피란을 못 간 김팔봉은 을지로3가 자신의 인쇄소 ‘애지사’ 2층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됩니다. 사흘이 지난 7월 1일 김팔봉은 돌아가는 얘기라도 들으려고 영문학자 최재서의 회현동 집에 갔다가 계동 친구 집까지 들러 귀가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때 아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와서 아버님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밤 11시쯤 장총을 맨 청년들이 2층으로 쳐들어와 김팔봉을 북창동 골목 삼화인쇄소로 끌고 갔습니다. 이곳은 남로당 서울 중구 당부 임시 사무소였습니다. 애지사 문선과장인 29세 전영환이 먼저 잡혀와 있었습니다.

둘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새벽에 망치질 소리가 들려 내다보니 흰 광목에 ‘인민재판소’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김팔봉은 불안한 와중에도 ‘내가 정부 고관도 아니고, 글 안 쓴 지도 오래됐고, 누구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큰 변이야 당하겠나’라며 애써 희망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전 9시, ‘인민재판소’ 플래카드 뒤쪽에 팔을 뒤로 포박한 김팔봉과 전영환을 앞장세우고 양옆에는 애지사 직공 12명이 6명씩 두 줄로 섰습니다. 그 뒤를 군중이 뒤따르며 시가행진이 시작됐습니다. 한 청년이 메가폰을 잡고 “인민재판, 인민재판”을 외치자 군중이 복창했습니다. 행렬은 남대문에서 세종로 네거리, 시청 앞, 동아일보 앞, 서울신문 앞을 세 번이나 반복해 오갔습니다. 그 사이 군중은 4~5백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그제야 김팔봉은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고 합니다. ‘깨끗하게 죽자, 누구도 미워하지 말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48세밖에 못 살았다고 한탄하지도 말자’ 이 생각을 끝없이 되뇌었습니다.
오전 11시. 마침내 행렬이 태평로 서울신문사 맞은편 국립극장(현 서울시의회)에 멈췄습니다. 서울신문사 쪽을 향해 인민재판소 깃발을 세우더니 애지사 식자공으로 일했던 차성태가 인민군을 찬양하는 선동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한 청년이 “지금부터 인민재판을 개정합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또 다른 청년이 ‘검사’라며 나섰습니다. 그는 영락영판소 직공으로 남로당 중구 출판노조원인 노동운이었습니다.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원고를 꺼낸 노동운은 누가 써줬는지 논고문을 더듬거리며 읽었습니다.

“김팔봉은 일제 때 공산당을 하다가 변절했고, 이승만 정권의 경찰 스파이로서 자기 인쇄소 노동자 다수를 투옥시켰고,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애지사의 좌익 성향 젊은 직공 5명이 삐라를 몰래 찍다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김팔봉은 오히려 책임지겠다고 보증을 서 3명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남로당 전북 책임자라고 자백한 40세 가량의 김봉두와 앞뒤 진술이 맞지 않았던 이인희만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형무소의 죄수들을 풀어주자 이 둘이 김팔봉을 고발해 인민재판에 넘긴 것이었습니다.
이어 증인이라는 17~18세 소년이 나와 고개도 못 든 채 더듬더듬 증언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네 직공으로 일하다 저 사람이 경찰에 고발해 서대문감옥에서 2년 반이나 고생하다 이번에 인민군의 승리로 겨우 나오게 됐습니다. 우리 노동자가 이렇게 착취당한 것이 다 이놈 때문입니다.” 검사도, 증인도 김팔봉이 본 적조차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뒤 ‘판사’가 등장했습니다. 서울오프셋공사 인쇄공 이영기였습니다. “피고는 검사가 논고한 바와 같은 사실의 죄악을 범해 왔고, 2년 반이나 철창 생활을 하고 나온 동지의 증언이 있었다. 검사의 구형과 같이 사형을 언도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5~6백 명 군중 가운데 바로 앞에 있던 40~50명만 박수를 쳤습니다. “옳소!”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김팔봉이 군중을 살펴보니 아는 얼굴은 ‘카프’에 동조했던 작가 출신으로 김일성 정권에 붙어 ‘해방일보’ 주필을 하던 이원조 한 명뿐이었습니다. 김팔봉은 자신이 이런 꼴로 죽는 것을 친구, 친지들이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7월 여름 하늘이 너무나 파랗고, 삼각산(북한산)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총탄도 아깝다. 때려 죽여라!”라는 소리가 들리고 건장한 청년이 몽둥이를 들고 나왔습니다. 철사로 둘둘 말고 쇠꼬챙이가 달린 몽둥이였습니다. 그가 김팔봉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치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습니다. 설마 하던 구경꾼들의 입에서 “어어!”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청년이 다시 몽둥이를 내리치자 김팔봉은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그런데 쓰러졌던 김팔봉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더듬더듬 막대기를 주워 들고 공격 태세로 세 발짝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두 청년이 달려와 머리와 몸통을 여러 차례 내리쳤습니다. 김팔봉의 몸은 더 움직이지 않고 축 늘어졌습니다. 그들은 김팔봉과 전영환의 발목에 전깃줄을 감고 계단 아래로 끌어내렸습니다. 한 계단을 내릴 때마다 김팔봉의 머리통이 덜렁거려 구경꾼들은 ‘이미 죽었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군중은 피 흘리는 두 시신을 남대문, 의주로, 서소문파출소까지 2㎞나 끌고 다녔습니다. 어쩌다 몸이 뒤집히면 뒤통수와 등, 꼬리뼈 부분이 갈려나가고 뭉개져 뼈가 허옇게 나온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피를 보고 더 흥분한 군중은 ‘인민재판, 인민재판’ 하며 소리를 질렀고, 거리를 지나던 시민은 기가 질려 머리를 움츠렸습니다.

한 인민군 고급군관이 행렬을 목격하고 ‘시신을 내무서에 인계하라’고 지시하자 군중들은 겨우 멈췄습니다. 시체를 갖다 버리라는 명령을 받고 인부들이 수도경찰청(서울 중구 소재) 앞에서 둘의 시신을 트럭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신 하나가 “물,물”하는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김팔봉이었습니다. 모질게도 생명이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내무서원은 김팔봉을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인계하고 전영환은 시체로 처리해 내다버렸습니다.

김팔봉이 몽둥이에 맞아 의식을 잃은 뒤의 상황은 목격자들이 증언한 내용입니다. 지금부터는 다시 김팔봉의 증언입니다. 얼마를 지났는지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는 창살이 있는 마루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내무서원이 “정신이 드느냐” 묻더니 “나오시오” 했습니다. 웬일인지 경어체를 썼다고 합니다. 내무서원 책상에 있는 일지를 보고 그날이 7월 6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꼬박 만 4일 만에 의식을 찾은 것입니다. 머리는 깨져 피와 흙으로 범벅이었고 등과 엉덩이 쪽의 옷은 다 해어져 옷이 앞쪽에만 걸쳐진 상태였습니다. 등과 허리의 살점은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내무서원은 하루 더 심문을 하더니 7월 8일 “집에 가시오” 했습니다. 김팔봉은 구두를 찾다가 못 찾고 맨발로 기어 나왔습니다. 기어 나오면서 전매청 공장 건물과 벽돌을 보고 자신이 있던 곳이 동대문서 자리인 것을 알았습니다. 몇 발짝 겨우 걷다. 가로수에 기대 쉬다, 기어가기도 하며 저녁이 돼서야 겨우 을지로3가 애지사로 돌아왔습니다. 큰아들이 뛰어나와 등에 업은 것까지 기억하고 다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김팔봉은 서린동 백내과에 입원해 김성진 박사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갈비뼈 틈에서 구더기 여러 마리를 끄집어냈다고 합니다. 입원한 동안 애지사와 집은 몰수되고 가족은 흩어졌습니다. 내무서원이 병원에 찾아와 자수서를 쓰라고 강요했지만 몸이 나으면 쓰겠다고 미루며 붕대를 풀지 않았습니다.

9월 2일 인민군 부상병들이 몰려와 병원에 자리가 없어지자 소개령(퇴원 통고)이 내려졌습니다. 모두가 꺼리는 신분이 돼 갈 곳조차 없었습니다. 회현동 최재서 씨 집에 이틀을 머무른 뒤 인민군에 협력하고 있던 한 친구가 주선해 줘 계동 동위원장 집에 숨어 있다가 눈물의 9.28 서울 수복을 맞았습니다.

함께 인민재판을 받았던 전영환은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은 부인과 친지가 리어카에 싣고 나오다 숨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단성사 부근 공립병원에 입원시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6개월 동안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헛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1951년 4월, 김팔봉은 인민재판 때 검사 노릇을 한 29살 노동운이 미군 해병대 군속으로 일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동대문경찰서 사찰계 강정화 경감이 수사에 착수해 11월 28일 노동운을 인제에서 체포했습니다. 이어 판사 역할을 한 29살 이영기, 33살 국도신문사 인쇄공 서명수, 현장에서 선동했던 33살 태양신문사 인쇄공 오세용, 47살 인쇄공 김봉룡, 시체를 운반했던 44살 인쇄공 김복룡 등 5명이 검거됐습니다. 이들은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피해자 전영환을 대질시키자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 ‘저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12월 6일 오전 11시, 인민재판 현장이었던 국립극장과 ‘시체’를 버린 수도경찰청 앞에서 현장검증이 실시됐습니다. 동대문경찰서장 이하 경찰관들이 총출동했고 김팔봉의 차남 김승한 씨와 전영환 씨가 입회했습니다. 범인들이 시체를 끌고 가는 처참한 광경을 재연하자 시민들은 새삼 그날의 공포와 분노를 되살렸습니다.(경향신문 1951.12.8.일자)

열 차례 공판 끝에 1952년 6월 10일 노동운과 이영기에게 사형, 나머지 4명에게는 최고 15년의 징역형이 선고됐습니다.(조선일보 1952.6.12일자) 노동운은 남로당 특수행동대에서 암살을 맡은 자로 6.25전부터 수배돼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위 내용은 당시의 신문기사, 6.25전쟁 종군기자 8명의 현장취재기록인 <한국전쟁 종군기자>(한국언론자료간행회,1987), <적 치하의 3개월-인민재판(중앙일보 1970.10.23.일자)> <김팔봉과 인민재판>(월간조선 2010년 6월호)의 기록을 종합한 것입니다.

당시 이런 인민재판은 김팔봉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목격자의 증언과 기록이 남아있는 1950년 7월 5일 이전의 대규모 인민재판만 해도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교정, 서대문 송월동, 명동 국립극장 앞, 돈화문 앞, 명륜동 입구 등 6건입니다. 1954년 별세한 김성칠 서울대 교수가 기록한 명륜동 성균관 앞에서의 인민재판의 모습은 이랬습니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이 청년 몇 사람을 끌어다 놓고, 한 집에 한 명씩 강제 동원한 군중을 향해 “이 사람이 반동분자요, 아니요?”라고 물었다. 모두들 기가 질려 아무 말이 없었는데, 그중 한두 사람이 “악질 반동분자요”라고 소리치자 인민군은 두말없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 죽였다. 피를 뿜으며 버둥거리다 숨지는 모습이 끔찍했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비사,2017)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마포형무소,서대문형무소,각 경찰서에 수감된 정치범 등 죄수들을 풀어줬고 이들은 ‘인민의 영웅’으로 추켜세워지며 공무원, 우익인사. 기업인, 지주, 군인, 경찰관을 색출해 학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까지 3개월 동안 수만 명이 체포됐고(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편 <한국전쟁(1)> 명성출판사,1986) 서울에서만 민간인 9천 5백 명이 살해되고 4천 2백 명이 납북됐습니다. 전국적으로는 인민재판 및 인민군 후퇴 시의 대량학살 등으로 살해된 사람이 16만 5천명, 납북된 사람이 12만 2천명으로 추산됩니다.(박윤식 <대한민국근현대사시리즈> 휘선출판사,2011)

김팔봉 인민재판을 보도한 경향신문 1952년 6월 21일자 기사는 공산주의의 본질을 이 한 문장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도 외형은 인간과 같으니 생리적으로 보아 인간이라고 해야 되겠지만, 그 무리들은 인간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가장 똑바로 증명하여 주는 것이 그들 공산도배들이 자행하는 소위 인민재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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