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비탈 걸음마다 야생이 기른 차향…풍경을 빚어내다

하동 | 글·사진 김정흠 여행작가 2026. 5. 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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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 문화의 시작점이자 결이 다른 ‘차밭’ 있는 곳, 경남 하동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소재의 다원 ‘유로제다’는 차와 풍경,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음미하는 소규모 차 체험 공간이다.

이 계절은 결국 향으로 온다. 코끝에 살짝 닿는 흙냄새,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꽃내음, 그리고 갓 우려낸 차에서 피어오르는 풋풋한 풀 향기까지. 그러니까 봄은 시각보다 후각으로 먼저 도착하는 계절이다. 해마다 4월 곡우 무렵이 되면 차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 한구석이 괜스레 분주해진다. 한 해의 첫물차, 우전이 막 세상에 나오는 시기여서다.

그 풋풋한 잎이 막 돋아나는 지금, 차향이 가장 진하게 머무는 곳이 경남 하동이다. 지리산 자락이 섬진강에 발을 담그듯 비스듬히 내려앉은 하동은 한국 차 문화의 시작점이자 여전한 본거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들여온 사신 김대렴이 왕명에 따라 처음 차를 심은 곳이 바로 하동의 골짜기다. 그로부터 1200년의 시간이 지금도 화개와 악양의 산자락에 야생으로 흩어져 자란다. 봄이 오면 한 번쯤 하동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바위틈에서 솟아난 야생의 생명력, 하동 차밭

보성이나 제주의 차밭을 떠올리면 융단을 펼친 듯한 정취가 먼저 그려진다. 정형화된 대규모 농장 특유의 단정함이다. 그러나 하동의 차밭은 결이 다르다. 가파른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차나무를 일구고, 바위틈에서는 야생 차나무가 솟아오른다. 차밭 한가운데 불쑥 솟은 바위, 그 뒤로 배경이 되어주는 대숲, 그 위를 떠도는 운무. 인도의 다르질링과 비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조량을 알맞게 조절해주는 안개, 자갈 섞인 사력질 토양, 큰 일교차가 만들어내는 향미가 화개동 야생차의 정체성이다. 하동 전통차 농업은 2017년 유엔식량농업기구가 지정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화개와 악양 일대에 흩어진 다원만 어림잡아 150곳이 넘는다.

차 한잔에 담긴 하동의 모든 것, 티카페 하동

티카페하동

하동 차가 낯선 이라면, 첫걸음은 화개면 하동야생차문화센터에서 떼는 편이 좋다. 박물관과 체험관, 치유관과 함께 1층에 들어선 ‘티카페 하동’은 그 모든 것을 한잔에 모아내는 공간이다. 매력은 ‘차 셀프 코너’에 있다. 하동의 이름난 다원들이 생산한 고급 우전을 직접 골라 우려 마실 수 있다. 다관과 모래시계를 앞에 두고 70~80도 식힌 물을 부으며 2분을 기다리면, 첫 우림에서는 아미노산이 빚어내는 감칠맛이, 두 번째 우림에서는 카테킨이 만드는 은은한 떫은맛이 한층 짙어진다. 두 번째 우린 차 맛이 가장 균형 잡혔다고 평하는 이가 많다.

메뉴판도 조금 특별하다. 작설의 하동 사투리에서 비롯된 ‘잭살탕’을 비롯해 인절미 와플 같은 디저트가 하동의 식재료로 차려진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다도 문화 체험인 ‘하동 티소믈리에’나 야외 ‘녹차 족욕’ 같은 힐링 프로그램도 좋겠다.

바람이 머무는 농가의 툇마루, 유로제다

화개면 정금리 산자락에는 백철호·엄옥주씨 부부가 1994년 도시를 떠나 터전을 닦은 작은 다원이 있다. 2000년 문을 연 ‘유로제다’다. 깊지만 맑은 차를 만들겠다는 뜻을 이름에 담았다.

이곳은 거창한 시설을 갖춘 카페가 아니다. 농가 주인이 직접 차를 우려주고, 손님은 그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차실 체험’을 신청하면 보통 서너 종의 차를 차례로 시음하면서 다도 강습을 곁들여 받는다. 찻잔을 왼손으로 받친 뒤 오른손으로 살며시 감싸쥐고, 빛깔을 보고, 향을 맡고, 두세 모금에 걸쳐 천천히 음미하라는 기본적인 매너부터 농부가 차를 길러낸 한 해의 이야기까지. 다도 강습의 격식을 내려놓고 오롯이 경관을 즐기고 싶다면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을 비우는 ‘툇마루 휴식’을 권한다. 두 프로그램 모두 소규모로 오붓하게 진행된다.

천년 숲을 곁에 둔 7대의 고집, 도심다원

도심다원

화개면 신촌도심길로 접어들면 ‘도심다원’이 나온다. 무려 7대째 차 농사를 이어오는 집이다. 외부에서 차나무를 들여온 적 없이, 토종 자생 야생차만 고수한다. 350도 안팎의 가마솥에서 덖고, 숯불 가마솥에서 가향하는 전통 수제차의 손맛이 이곳에 있다.

도심다원이 터를 잡은 마을 일대는 한국 최고령 차나무가 살아 숨 쉬던 곳이기도 하다. 높이 4.1m에 둘레 52㎝를 자랑하던 이 천년차나무는 안타깝게도 2011년 동해로 고사했고, 지금은 수령 100년에서 500년으로 추정되는 후계목 15그루가 그 자리를 잇는다.

차의 최초 재배지에서 신촌차밭과 천년차나무 후계목, 도심다원을 거쳐 정금차밭에 이르는 ‘천년차밭길’은 약 2.7㎞. 1시간에서 1시간 반 남짓 여유롭게 거닐 수 있는 길이다. 정금차밭 정상의 단금정에 오르면 화개 골짜기가 한눈에 펼쳐진다. 다원에서는 야외 정자를 예약해 즐길 수 있는 ‘차 바구니 세트’가 인기다. 녹차와 다기, 간식, 피크닉 매트가 한데 담긴 바구니를 받아 정자에 앉으면, 그 자체로 호사스러운 봄 한나절이 된다.

사계절이 걸리는 다다미방의 차경, 매암제다원

매암제다원

하동의 차밭은 화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악양면 평사리 들판 너머에 매암차문화박물관, 그러니까 ‘매암제다원’이 있다. 1963년 고 강성호 선생이 옛 경상남도 임업 시험장을 매입해 시작한 다원으로, 현재 강동오 관장이 3대째 이어가고 있다. 약 1만8000㎡의 차밭을 지닌 이곳에는 2000년 5월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차 문화 사립박물관이 함께 들어서 있다.

박물관으로 쓰이는 건물은 1926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림국이 임업 연습림 부지에 세운 임업 시험장 관사다. 일본식 가옥의 마루와 복도, 창문, 다다미가 그대로 살아 있다. 다다미방의 창을 액자처럼 잘라낸 너른 차밭은 사계절의 그림이 걸리는 한 폭의 차경(借景)이 된다.

이곳에서 빚어내는 차 가운데 시그니처는 홍차다. 매암홍차와 산뜻홍차, 고소홍차로 결을 달리해 선보인다. 음료를 주문하면 다관과 잔, 모래시계가 함께 나온다. 찻잎은 세 번 우려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차밭 농부와 마주 앉은 따뜻한 시간, 다담 in 다실

차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다원으로 가야 하나’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럴 땐 하동 주민들이 만든 공정여행사 ‘놀루와 협동조합’의 문을 두드려보자. 시인이자 군청 공무원 출신인 조문환 대표가 꾸려가는 이곳은 차밭 농부와 여행자를 이어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두었다.

대표 프로그램이 ‘다담 in 다실’이다. 놀루와가 차밭 농가를 주선하면, 여행자는 농가의 다실을 온전히 빌려 차 농부와 오붓하게 마주 앉는다. 차와 다기, 다식이 차려지고, 농부는 손수 차를 우려주며 한 해의 농사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다도의 기본자세부터 그릇의 이름, 물의 온도까지 책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결의 정보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농가의 창밖으로는 지리산과 차밭이 한 장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차향 너머, 하동의 자연을 굽어보다

최참판댁

차향이 몸과 마음에 짙게 배어들었다면, 이제 그 야생차를 묵묵히 길러낸 하동의 자연으로 시선을 돌려볼 차례다. 하동송림공원은 조선 영조 21년(1745년) 도호부사 전천상이 섬진강 모래바람을 막으려 조성한 인공 솔숲이다. 약 900그루의 노송 사이를 거니는 맛이 일품인 국가유산 천연기념물이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은 1998년 한옥 14동으로 지어진 세트장으로, 평사리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며 발길을 붙잡는다.

조금 더 짜릿한 정취를 원한다면 스타웨이하동으로 향하자. 섬진강 수면 위 150m 상공에 별 모양으로 세운 스카이워크로, 투명 바닥이 깔린 일부 구간에선 발끝이 절로 긴장한다. 마지막은 하동케이블카. 2022년 개장한 이 케이블카는 해발 849m의 금오산 정상까지 올라가며, 한려해상 다도해와 지리산 자락을 동시에 품는 풍광을 내어준다.

차는 결국 기다림의 음료다. 물을 끓이고, 잎이 펴지기를 기다리고, 향이 오르기를 기다린다. 봄이 익어가는 하동의 골짜기에서, 그 기다림에 잠시 마음을 맡겨보자. 우려진 찻물의 빛깔만큼 천천히, 그리고 깊게.

하동 | 글·사진 김정흠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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