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장갑’이 ‘손모아장갑’이 되기까지 [.txt]
장애인 폄하 우려에 대체 용어 고민
‘엄지장갑’ ‘통장갑’ 같은 다른 대안도
한 언어에서도 시대에 따라 번역 필요

한국 사회는 대체로 개인의 다양성보다는 정해진 경로를 중시하는 가치관이 아직은 우세한 편이다. 물론 워낙 역동적인 나라다 보니 꾸준히 달라지고 있으며 특히 세대에 따라 차이가 작지 않다. 문화 다양성 인식은 자신과 다른 인종이나 국적뿐 아니라 성별, 성적 지향, 종교, 사회경제적 지위, 세대 등과 관련이 있다. 장애 수용과 이해 역시 문화 다양성 인식의 핵심 지표이며 우리가 일반적인 경로에서 벗어난 삶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다.
사회적 인식 개선에는 명칭 변경을 비롯한 언어의 변화도 뒤따른다. 한때는 정치적 공정성을 잘못 적용해 장애인을 ‘장애우’로 상대화하기도 했다. 언뜻 좋아 보여도 막상 남들과 달리 친구라고 따로 불리는 집단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염두에 두지 않은 발상이다. 특정 집단을 더 큰 공동체 내지 시민사회 안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시키는 것을 언어로 드러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벙어리장갑’에 언어 장애인을 낮잡는 단어인 ‘벙어리’가 있다는 이유로 2010년대에 새로 생긴 ‘엄지장갑’이나 ‘손모아장갑’ 같은 대체 용어의 쓰임도 최근 들어 더욱 늘었다. 다만 기호가 바뀔 때 말하는 이의 속내도 함께 바뀌지 않으면 도루묵일 때가 많다. 장애인이 더 잘 살도록 하는 행동과 조치가 없다면 말잔치에 그칠 때도 많다. 물론 말 새로 바꾸기부터 그 행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미 굳어진 말이고 비하의 의도가 없는데 굳이 쓰지 말라고 강요하는 게 더 억지스럽다는 불평도 없지 않지만, 그런 말들은 세월이 흐르면 의식하지 않아도 사라지거나 구시대적이라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중론이 모이면 없어진다.
손가락 다섯개를 하나씩 감싸는 손가락장갑과 달리 벙어리장갑은 엄지만 따로 가르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함께 감싼다. 손가락이 다 보이지 않게 막혀 있어서 생긴 이름 같다. 영어 ‘덤벨’(dumb-bell, 벙어리 종)도 소리 없이 연습 삼아 흔드는 교회 종을 일컫다가 운동 기구 ‘아령’도 뜻하게 됐다. 아령(啞鈴, 벙어리 아, 방울 령)은 덤벨의 번역 차용어다. 영어 ‘덤’(dumb)은 비하의 뉘앙스 없이 ‘신체적으로 말을 할 수 없음’을 서술적으로 일컫다가 이제 ‘바보’로 주된 뜻이 옮겨갔다. 합성어 수식어로서 ‘덤 체임버’(dumb chamber, 출구 없는 방)에서처럼 본래의 속성에서 뭔가 모자란다는 뜻도 함의하나 이제 덤벨 말고는 많이 쓰이지 않는다.
‘벙어리저금통’도 돈 넣는 구멍 외엔 막혀 있어서 붙은 이름일 텐데, 이제는 ‘돼지저금통’ 또는 그냥 ‘저금통’만으로 흔히 통한다. 다만 ‘벙어리’는 푼돈을 모으는 조그만 통도 일컬어 일종의 동어반복 합성어일 수도 있다. ‘항아리’(缸+아리)와 비슷한 파생어거나 ‘바구니’나 ‘방구리’(물 긷거나 술 담는 질그릇)와 관계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손모아장갑’보다 ‘엄지장갑’이 좋다. 조어법상 깔끔한 통사적 합성어를 더 반기는 취향도 작용한다. 먹자골목, 떴다방, 척척박사, 몰래카메라 등 비통사적 합성어는 대개 점잖지 못하나 달리 보면 생생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웹 검색 결과 ‘엄지장갑’과 ‘손모아장갑’의 사용 빈도는 얼추 비슷한데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검색으로는 후자가 더 많다. 나도 실제로 본 것은 아들의 장갑 라벨에 붙은 ‘손모아장갑’이다.
신문 검색에서 ‘벙어리장갑’은 1957년부터 보이고 조선말대사전 및 50년대 후반 북한 자료에도 나오는 걸로 보아 적어도 분단 이전부터 남북에서 다 쓰던 걸로 짐작된다. 조선말대사전에는 ‘통장갑’이 주표제어로 나온다. 통마늘, 통닭 등 ‘통째’(덩어리)를 뜻하는 접두사 ‘통-’이 쉽게 와닿아 북한어일지라도 대체어로서 손색없는데 슬슬 자리를 잡아 가는 말들에다가 후보를 또 늘리기는 좀 저어된다.
1900년부터 쓰인 스웨덴어 툼반테(tumvante, 엄지 tum + 장갑 vante)도 ‘엄지장갑’과 얼개가 똑같다. 우연의 일치일 테지만 어쨌든 스웨덴어와 한국어에 유이(唯二)한 표현이다. 독일어 파우스트한트슈(Fausthandschuh, 주먹 Faust + 장갑 Handschuh)를 직역했다면 좀 투박한 ‘주먹장갑’이 됐을 텐데 그보다는 따뜻한 ‘손모아장갑’이 낫겠다.
중앙아시아 언어와도 접점이 보인다. ‘(벙어리)장갑’을 뜻하는 타타르어 비얄래이(бияләй), 카자흐어 비얄라이(биялай), 몽골어 베엘리(бээлий)는 한국어 ‘벙어리’와 소리가 우연히 비슷한 만큼 모종의 관계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장갑’은 18세기 문헌에서부터, ‘벙어리장갑’은 20세기 후반부부터 보이는데, 한국어 문헌 자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음도 염두에 둬야겠다.
지금은 농아 소통 수단으로 주로 수어가 쓰이지만 미국은 특히 19세기 후반 농아교육에서 수어 대신 독순술로 음성언어를 익히도록 하는 구화법(oralism)이 널리 퍼졌고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학생이 수어를 하지 못하도록 장갑을 끼워 묶기도 했다는데 ‘스루 데프 아이스’(Through Deaf Eyes)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온다. 한국의 농아교육에 미국의 영향도 있겠으나 이런 방식을 ‘벙어리장갑’의 어원으로 단정하기엔 증거가 모자란다. 구체적인 당시 문헌 자료가 없는 걸로 보아 체계적 억압보다는 일시적 또는 개별적 방법이었을 듯싶다.

표현은 언어마다 또는 개인마다 다르고 장애인 정체성 또는 인권의식 등이 현대적 개념이듯이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만 번역이 필요한 게 아니고 한 언어 안에서도 시대가 달라지면 번역이 있어야 한다. ‘엄지장갑’이나 ‘손모아장갑’이라는 대안을 염두에 두면서 함께 사는 시민으로서 동료의식을 다잡는다면 더욱 좋겠다. 단순히 약자에게 베푸는 동정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나누는 공감으로 말을 바꿀 때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신견식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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