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강진 작천초교… 잠시 멈춤, 휴식이 필요하거든(상)[남도 학교기행]

선명완 2026. 5. 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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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천초등학교 전경(사진 홈페이지)

#까치들의 집단 서식지였을까

매월당(梅月堂)이나 고산자(古山子)처럼 고을고을을 쏘다니며 우리의 고유한 지명에 얽힌 얘기를 추적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설화적 요소와 역사적 일화가 뒤섞여 있기도 하지만, 길고 오랜 세월 쌓인 고전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한 재미가 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나게 되는 향기로운 땅, 그곳의 이름은 대개 주변의 자연 지형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땅 이름, 지명이니까. 하지만 한자 표기가 도입하면서 본래의 것이 사라지거나 의미가 크게 변절된 예가 수두룩하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수도 동경(경주)의 편재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9주 5소경과 주(州)·군(郡)·현(縣) 체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때의 명칭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명의 근간이 되었다. 국가 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화를 염두한 것으로, 그 내용은 한화정책(漢化政策)이었다.

당(唐)의 통치 체제를 도입하고 유교적 통치 질서를 앞세워 관제는 물론 지역명까지 중국식으로 개편하였다. 그 결과 지명 대부분이 2글자인 한자로 표기됨으로써 지명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게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강제적 행정구역 개편은 다시 한번 그 지역이 갖는 고유성은 물론 각 지역의 경계와 의미마저 흩뜨려 놓았다. 지명 판도의 대지진이었다.

경덕왕 정권의 체제 개편은 부족 중심의 전통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기존 지방 세력의 기반인 혈연권과 연고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확장된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국정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신개념 통치술, 그게 의식의 지도를 바꾸는 것이었으리라.

'작천면(鵲川面)'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공식 문서는 1914년 3월 1일 발령된 전라남도령 제2호 <군·면의 명칭 및 관할 구역에 관한 건>이다. 이보다 앞서 1913년 12월 29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도·군의 명칭·위치 및 관할구역의 규정>이 공포되었다.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은 토지의 수탈 그 이상의 의도가 개입되었다.

식민지 속국 군·면에 대한 인위적이고 전반적인 행정구역 개편은 기존 질서의 해체와 종속을 겨냥한 것이었다. 가벼이 지나칠 수 없다. 경덕왕과 일제에 의한 강제적 행정구역 개편은 지역의 고유성을 잃게 된 대참사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역사적 신조어, '작천'이란 무엇일까. 동쪽을 뜻하는 우리말 '아찬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까치내는 강진 성전면 월출산 무위사 자락 또는 경포대에서 발원해서 병영의 금강천에 합류하기에 '동천(東川)' 즉 아찬내라고 할 수 없다. 지역에 유달리 조류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다거나, 오작교처럼, 까치가 놓은 다리를 통해 청춘남녀들이 만나곤 했다는 설화도 있다. 상상력이 과도하게 개입된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국어학적 어원 분석이다. '까치'는 '까치설'에서 보듯 '작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꾸밈말이기에, 까치내는 큰 강인 탐진강에 대비하여 '작은 시내'를 의미한다고 하는 것이다. '가짓내' '가지내'라는 말은 지류나 샛강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불리던 '가지내'가 '까치내'로 경음화되어 한자 표기를 하면서 까치 '작(鵲)', 내 '천(川)'이라고 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에 동의하며, 단정하자면 '작천'은 '작은 내'이다.
학교 수호목 역할을 하고 있는 팽나무 4그루(2026년 4월)

#목신의 오후

프랑스 상징문학의 거장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문학적 도구였던 목양(牧羊)의 신, 즉 '목신(牧神)'에게는 인간의 이성과 동물의 야만성이 공존한다. 나른한 오후의 적막함, 그 속에서 느껴지는 실존의 허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육체로 인한 갈등을 정신적 산물인 시와 노래로 치환하려는 의지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포유강, 영장목으로 분류되는 동물계의 하나로서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욕망, 그것을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빚어내고 예술로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밤하늘 별빛과 같은 지향이었으며 고뇌이기도 했을 것이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의 수종은 무엇이었을까. '밝은 땅의 임금'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단군'이라 표기했기에 음가가 비슷한 '박달나무 단(檀)'자를 썼다는 설이 있다. 박달나무는 재질이 아주 단단하고 야무져서 배달민족의 강인한 기상을 상징하는 나무이기에 그럴듯한 얘기이다.

단군신화의 무대인 백두산 인근을 비롯한 만주,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 전통을 인류문화사적으로 분석하여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 역할을 했던 신령한 나무인 자작나무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북방 민족들은 자작나무를 우주수(Cosmic Tree)로 숭배하였다고 한다. '신단수'는 '신령한 제단 나무'를 뜻하는데, 우리 산야에서 제사를 지낼 때 가장 흔히 사용되고 신성시되던 나무가 참나무 계열인 신갈나무였다. 신갈이 '신을 갈아 준다', '옷을 갈아입힌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신갈나무라고 분석하는 예도 있다.

말라르메의 목신(牧神)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른한 오후의 실존적 욕망', 일상에 침입한 무단한 공허와 피로감, 더구나 삶이 얽혀서 종잡을 수 없을 때, 그럴 때면 무심히 찾는 곳이 작천초등학교이다. 지역의 원주민이거나 잠시 들르는 나그네들이거나 모두에게 안식과 위로를 주었던, 그래서 어느덧 신이 된 나무, 목신(木神)이 그곳에 정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정에 들어서면 반겨주는 팽나무 네 그루가 그 목신(木神)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신단수, 학교의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목, 커다란 그늘을 지어주는 신목(神木)이다. 대략 350년 수령을 잡수셨으며, 소통과 화합의 장소, 새참이나 휴식의 공간으로 세월을 쌓아 가고 있다.
강진 병영 박약국 문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1호, 사진 국가유산청)

#민립학교 설립 운동

'교육 지도(地圖)'라는 게 있다면 육지의 섬에 해당하는 곳이 강진군 옴천면이나 작천면이 아닐까 싶다. 근래 옴천의 인구는 563명으로, 그 지역의 격리성을 나타내는 말이 몇 가지 전하기도 한다. 중학교는 1973년에 개교하여 23년 동안 운영되다가 야트막한 고개 넘어 병영에 통폐합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작천의 유일한 초등교육 기관은 작천초등학교 한 곳뿐이었다.

작천에서 근대교육을 일으킨 사람은 직암 손재수(直庵 孫在洙, ?~1932)이다. 본관이 밀양이라서 경상도 출신으로 소개되곤 하지만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외교적 수완에 능했다',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등의 세간의 얘기들도 확인이 필요한 대목이다.

다만 작천면 용정마을에 정착하였다는 사실, 1984년 12월 동학농민군에 의해 함락되기 전까지 전라병영성에서 사과(司果, 정6품 무관) 벼슬을 지냈다는 행적은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박약국'을 운영했던 대표적 병영 상인 강재 박기현(剛齋 朴冀鉉, 1864~1913), 그가 1891년~1903년까지 남긴 개인 일기인 『일사(日史)』에 '손 사과'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당대 전국적인 약재 유통망을 보유했던, 박기현의 '박약국'과의 인연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병영성이 함락될 무렵까지도 박기현 등 지역 유지들과 대소사를 논의하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후 박약국의 문적 관리와 서무를 담당하며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그에게 회계 실무 능력과 문서 작성 등 필기 능력이 충분하였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박약국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약제를 납품하는 등 경제적 수완을 발휘하여 상당한 자산을 축적하였다 한다. 박기현과 손재수는 병영지역에서 자연스러운 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라병영성의 무관과 지역 내 유력한 상인 사이 미시적 정경유착도 존재하였겠지만, 본향이 같은 밀양이라는 점도 신뢰 형성에 깊이 작용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에게 동향 의식은 혈연만큼 강하게 작동하는 생래적 요소 아닌가.

그가 교육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작천사립보통학교(현 작천초등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점이다. 3.1 운동 이후 전국 각 지역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립학교 설립 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921년 7월 학교 설립 과정에서 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그간의 사재를 출연하였다. 당시 사립학교 인가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토지와 현금 등 기본 재산을 확보하여 학교 건립을 주도한 것이다. 박약국 가문의 박기현 아들 박형숙(朴亨淑, 1885~1957)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과 함께 '교육 구국'을 결심한 것이다.

비록 사립이었지만 1921년 7월 개교 당시 20명의 인재가 입학하였다. 작천에도 근대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1926년에는 공립으로 전환되어 4그루 팽나무와 함께 현재까지 작천면의 유일한 초등학교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당시 강진읍에는 군수였던 조중관(趙重觀)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사립금릉학교(강진중앙초 전신), 병영에는 1910년 방익상(房翼相)이 설립한 병영사립융흥학교가 1913년에 병영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옴천에서는 조금 늦은 1928년 9월 1일 옴천공립보통학교가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지역 아동들의 문맹 퇴치와 실력 양성, 구국운동이 강진 곳곳에서도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