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이창호·이세돌·신진서… 한국 바둑 최강자는 누구인가 [GOAT 논쟁, 당신의 선택은?]
편집자주
‘누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가’는 스포츠팬들 사이에서 해묵은 논쟁거리입니다. 다른 시대, 다른 환경, 다른 팀에서 뛴 선수들을 한 줄로 세우는 건 어려운 일이기에 각자의 의견도 다릅니다. 오직 한 명만 존재할 수 있는 고트(GOAT∙Greatest Of All Time), 여러분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둑은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두뇌 스포츠다. 정확한 기원조차 분명하지 않다. 약 4,300년 전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요(堯)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를 깨우치기 위해 고안했다는 설이 전해질 뿐이다. 신화 같은 이야기지만, 역설적으로 바둑이 동아시아 문명의 시작과 함께 인류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자와 맹자도 바둑을 논했고, 일본 전국시대 때는 혼인보·이노우에·야스이·하야시 등 4대 가문이 전문 기사를 육성했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전설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혼인보 도사쿠, 우칭위안(오청원) 등은 가로세로 19줄의 바둑판에 ‘포석(布石)’ 개념을 창시 또는 재정립하며 바둑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들로 꼽힌다.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이 주도했던 세계 바둑의 흐름이 한국으로 넘어온 건 1980년대부터다. 조훈현(73) 9단이 1988~89년 제1회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대회에서 초대 우승자로 오른 것을 시작으로, 이창호(51) 9단과 이세돌(43) 9단의 시대를 거쳐 신진서(26) 9단의 독주에 이르기까지, 세계 바둑의 중심에는 늘 한국이 있었다.
특히 많은 바둑 팬은 이창호의 전성기를 떠올리며, 그를 현대 바둑의 고트(GOAT·역대 최고 선수)로 꼽는다. 그러나 네 기사가 남긴 각종 기록과 시대적 의미, 그리고 바둑사에 남긴 발자취를 살펴보면, 한국 바둑의 GOAT를 한 명으로 특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최강자들의 통산 전적

GOAT 논쟁에서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기록표다.
우선, 통산 승수에서는 8일 기준 이창호(1,984승)가 조훈현(1,968승)을 근소하게 앞선다. 두 기사 모두 2,800국 안팎으로 치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부문에서는 이창호가 한발 앞선다. 다만, 이세돌(1,324승)과 신진서(912승)는 활동 기간이 두 선배 기사에 비해 짧고 대국 수도 못 미친다. 누적 승수만으로 고트를 논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면 승률은 어떨까. 신진서(79.5%)가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이창호(70.7%) 조훈현(69.8%) 이세돌(69.7%)이 뒤를 잇는다. 본인의 대국 수에서 승리만을 추린 수치인 만큼 가장 직관적인 강함의 지표다. 다만 전성기가 지난 시점부터는 자연스럽게 하락하는 특성도 있다. 현재 커리어 정점에 있는 신진서가 가장 높은 승률을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통산 타이틀 보유 개수 역시 단순 비교는 어렵다. 조훈현은 162개의 타이틀을 획득해 이창호(142개) 이세돌(50개) 신진서(44개)를 크게 앞선다. 하지만, 활동 기간이 가장 길고 이제는 사라진 타이틀 기전까지 모두 치렀다는 점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다. 또 세계 기전 우승만 따로 뽑아 보면 조훈현(13회)은 이창호(23회), 이세돌(18회)에게 밀리고, 신진서(12회)에게도 바짝 추격당하고 있다.
상대 전적 역시 절대 기준이 되긴 어렵다. 각자의 전성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훈현과 신진서는 세대 차이 때문에 이벤트 대국 1차례를 제외하면 공식전 맞대결조차 없다.
역사의 한 장면
기록으로 판가름이 안 난다면, 네 기사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밖에 없다.
우선 수치상 가장 압도적인 인물은 이창호다. 세계 바둑 랭킹 사이트 '고레이팅'에 따르면, 그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6년간 세계 최강자로 군림했다. 스승 조훈현(8년)은 물론, 이세돌(5년)의 전성기 기간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세계 1위를 고수 중인 신진서도 앞으로 최소 8년 이상 지금의 기세를 유지해야 이창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바둑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꿨다. 종반 운영과 ‘끝내기’라는 개념을 만든 이창호식 바둑은 우칭위안 이후 가장 혁신적인 흐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스포츠에선 단 한순간의 임팩트가 모든 기록을 뛰어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영화 '승부' 도입부에 나오는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이다. 당시 조훈현은 주최 측이 초청한 16명의 기사 중 유일한 한국기원 소속이었다. 한국 바둑이 여전히 변방에 머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대 최강자들을 연파하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도 '중일 슈퍼 대항전' 11연승의 주인공 녜웨이핑(섭위평·중국)을 대국 전적 3-2로 제압했다. 한국 바둑 최초의 세계 기전 제패였다. 김포공항에서 서울 종로에 위치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을 정도로, 이 우승은 한국 바둑의 역사를 바꾼 사건이었다.

물론 이창호도 스승에 필적하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2005년 2월 '바둑 삼국지'라 불리는 제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다. 그는 한국의 최종 주자로 나서 중국 기사 3명과 일본 기사 2명을 연달아 꺾고 한국에 우승을 안겼다. 일명 '상하이 대첩'이다. 특히 5연승의 시발점이 된 뤄시허(나세하·중국) 9단과의 대국을 앞두고, 부산 농심호텔 복도를 홀로 담담하게 걸어가던 이창호의 모습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중국 기사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동하던 장면과 극명하게 대비돼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임팩트는 이세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는 2016년 3월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에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5번기 호선 맞대국을 펼쳤다. 대국 전만 해도 이세돌의 낙승을 점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알파고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력으로 1~3국을 연달아 따냈다. 그러나 '센돌'은 4국에서 역사적인 한 수(78수)를 착수, 결국 백 불계승을 거뒀다. 대국 후 분석에 따르면, 알파고가 백을 잡고 이 수를 둘 확률은 0.007%에 불과했다. 인공지능을 상대로 만들어낸 이 '신의 한 수'를 통해 이세돌은 바둑을 넘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신진서는 '상하이 대첩'을 두 번(제22회·제25회 농심배)이나 재현하며 선배들의 역사를 현재형으로 다시 쓰고 있다. 특히 제25회 대회(2023~24년)에서는 최종 주자로 나서 막판 6연승으로 싹쓸이 우승을 완성하며, 이창호의 종전 끝내기 최다 연승 기록을 뛰어넘었다. 또 농심배 개인 최다 연승(21승)과 통산 전적(21승 2패·승률 91.3%)에서도 이창호(14연승·통산 19승 3패)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꾸준히 진화하는 중이다.
돌고 도는 일인자들의 기풍
바둑 팬 개개인이 선호하는 기풍도 GOAT 선정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화려한 공격형 기풍을, 또 다른 누군가는 흔들림 없는 수읽기와 안정감을 높게 평가한다. ‘어떤 바둑이 더 위대한가’에 대한 개인 취향과 철학 논쟁이다.
'SG배 한국일보 명인전' 해설을 맡고 있는 정두호 4단은 "흥미롭게도 네 기사를 거치면서 '공격 지향형'과 '수읽기형' 기풍이 반복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선 조훈현 9단은 한국 바둑 역사상 가장 본능적이고 공격적인 기사로 꼽힌다. 정 해설위원은 "'속력행마(速力行馬)'라는 별명 그대로 날렵하고 빠르다”며 “부분 전투에서 치열함이 돋보이는 기풍"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는 초반부터 판 전체의 흐름을 주도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스타일로 한국 바둑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반면, 제자인 ‘돌부처’ 이창호 9단은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정 해설위원은 "조 9단의 제자임에도, 그와 정반대로 유연하다"며 "상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본인에게 유리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철저히 안정성과 균형을 중시하는, 상대적으로 두터운 수비형 바둑"이라고 분석했다.
이세돌 9단은 다시 공격 본능을 극대화한 기사였다. 정 해설위원은 "기본적으로 조훈현 9단과 비슷한 스타일로, 전투 지향적인 바둑"이라고 했다. 이어 "다만, 조 9단이 초반에 얻은 우세를 바탕으로 후반을 운영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세돌 9단은 초일류 기사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초반이 다소 약한 편"이라며 "그럼에도 중반 이후부터의 수읽기에 굉장히 강하고, 동시에 심리를 파고들어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기보로만 보면 이 9단의 상대가 이해하기 힘든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이 9단이 상대의 불안 요소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현재 세계 최강자인 신진서 9단은 다시 ‘수읽기형’ 계보에 가깝다. 정 해설위원은 "신 9단은 이창호 9단처럼 수읽기에 능한 기풍"이라며 “어린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초반이 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인공지능을 활용해 연구하면서 (초반도) 많이 강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마라톤 기록이 시대가 흐를수록 계속 발전하듯, 바둑 역시 계속 진화하는 종목"이라며 "그런 면에서 순수 기술적인 완성도만 놓고 보면, 현재의 신진서 9단이 가장 높은 수준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해설위원의 마지막 발언 속엔 GOAT 논쟁의 난점이 담겨 있다. 조훈현이 한국 바둑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개척자’였다면, 이창호는 가장 오랫동안 정상에 군림한 ‘절대자’였다. 이세돌은 승부사 본능으로 인간 바둑의 존재감을 세계에 각인시켰고, 신진서는 인공지능 시대 이후의 바둑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한 기사다.
‘바둑 고트’ 논쟁엔 정답이 없다. 다만, 한국 바둑의 역사는 시대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상에 오른 네 명의 천재들이 함께 써 내려왔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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