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 ‘취업 쇼크’…취준생 얘기 아닙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이죠.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4월이면 이런저런 글에 종종 등장하는 이 표현, 영국의 유명 시인 T.S.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의 첫 소절입니다.
430행이 넘는 장편 시라 다 읽은 분 많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저도 첫 소절 외엔 잘 모릅니다.
그래서 '클리셰'처럼 더 자주 쓰는 이 표현을 꺼낸 이유, 최근 공직 사회를 술렁이게 한 잔인한(?) 4월의 사건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 갑작스러운 4월의 '취업 쇼크'
누구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죠.
굳이 법까지 갈 것도 없죠. 더 좋은 일자리를 갖고 싶은 건 당연한 욕망입니다.
근데 공무원은 좀 다릅니다. 이 자유가 일부 제한됩니다.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할 때 심사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심사 결과 이직이 막히기도 합니다.
단, 모든 공무원이 그런 건 아닙니다.
이른바 '높은' 분들만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데요. 바로,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 제도입니다.
☞ 퇴직 공직자 취업 심사
· 누가?4급 이상 일반직 공무원 (혹은 그에 준하는 신분)
· 언제? 퇴직 이후 3년 안에 재취업하려 할 때
· 어떻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업무 관련성 없다고 판단해야 취업 가능
큰 뼈대는 이렇지만, 자세히 들어가면 꽤 복잡합니다.
4급 미만인데도 심사받아야 하는 공무원이 적지 않습니다. 감사원, 국세청, 관세청, 공정위, 검찰, 경찰 등입니다. 수사나 인허가, 규제 등을 다루는, 속칭 '끗발' 있는 기관이라 그렇습니다.
공무원이 아닌데도 심사받아야 하는 기관도 있습니다. 한국은행이나 금융감독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퇴직하면 금융사에서 바로 모셔가는 '센' 곳이라 그렇습니다.
심사 기준도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국가 안보부터 경영개선, 업무 관련성, 전문성까지 따지는 게 한둘이 아닙니다.
다만, 국민들 입장에서 가장 궁금한 건 결국 이거 아닐까요. 취업이 얼마나 불허되느냐, '탈락률' 말입니다.
■ 탈락률, 계산해 봤습니다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니 꽁꽁 싸매고 비공개할 것 같은데, 정반대입니다. 심사 결과는 매달 다 공개됩니다.
공직윤리시스템 홈페이지에 다 나옵니다. 지금은 2016년 1월 심사 결과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사 대상자 이름을 가리긴 합니다. 그러나 어느 기관 출신인지, 최종 직위는 무엇인지, 어느 회사를 가려고 했는지 다 나옵니다.
어지간한 고위 공직자라면 1~2분만 검색해도 누군지 금세 알 수 있고, 실무자급이라고 해도 같은 업계 사람들은 한두 다리 건너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반실명제'에 가깝습니다.
궁금한 탈락률, 확인해 봤습니다. 취업 심사 대상자 기준이 현재 수준으로 재편된 2020년 6월부터 가장 최근인 2026년 4월까지, 총 71개월 치에 대한 통계입니다.
탈락률 약 10%.
달마다 진폭은 있지만, 퇴직 공직자 10명 중 1명 정도가 재취업이 불허되고 있었습니다.
분석 기간은 3개 정부에 걸쳐 있는데, 정부 성향에 따라 탈락률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스트라이크존이 바뀐 걸까
야구에 스트라이크존이라는 게 있죠. 얼추 이 정도 들어온 공이면, 스트라이크로 잡아주는 그 높이와 너비를 말합니다.
국가마다,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강의 합의점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쌓인 경험, 축적의 결과입니다.
구력이 오랜 투수의 방어율도, 타자의 타율도 평균에서 크게 잘 안 벗어납니다. 축적은 곧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법입니다.
취업 심사도 비슷합니다. 제도는 1983년 1월 1일 시작했습니다.' 전관예우' '관피아' 등 공직 비리가 불거질 때마다 제도가 더 빡빡해지긴 했지만, 43년 간 큰 틀은 유지돼 왔습니다.
탈락률의 핵심 변수는 취업 허가 기준입니다. 이게 바뀌지 않는 한, 탈락률도 어느 정도는 일정한 수준에서 움직이는 축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갑작스러운 결과가 나옵니다. 탈락률 33.8%.
심사 결과가 공개된 자료 기준으로 역대 최고치이자, 한 달 전인 3월 탈락률(4.5%)의 7.5배였습니다.

면면을 뜯어보면 이렇습니다.
전 인사혁신처장이 로펌으로 가려다 막혔고, 금감원 부원장도 공공기관 원장에 취임하려다 무산됐습니다. 감사원 고위직의 퇴직 코스처럼 여겨졌던 금융사 감사 취임이 불허됐고, 산업부 고위공무원이 산하 협회 상근부회장으로 가던 관행도 깨졌습니다. 쿠팡으로 옮기려던 금감원 직원들도 재취업이 막혔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이런 말이 어렵지 않게 들렸습니다. 일부 기사들은 '쇼크' '패닉' 이란 표현을 써가며, 술렁이는 공직 사회 반응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 "공교로운 우연" 정말일까
4월 취업 심사 문턱이 갑자기 높아진 이유가 뭘까요.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물었더니, "공교로운 우연"이라고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공직자윤리위원장과 당연직 부위원장인 인사혁신처장이 바뀌긴 했지만, 총 13명인 윤리위원 구성이 최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취업 심사 관련 규정이 크게 바뀐 것도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취업 불허 사유에 해당하는 신청이 우연히 많이 몰린 것 같다는 겁니다.
반면, 퇴직 공직자의 민간행에 대한 '기조'가 달라졌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같은 사람들이 같은 규정으로 판단하는 데 한 달 만에 탈락률이 급증할 수 있냐는 겁니다.
때마침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미묘한 소식도 있었습니다.
[연관 기사] 강훈식 “도로공사 퇴직자 단체 고속도로 휴게 운영, 부당이익 환수·수사의뢰”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552343&ref=A
청와대가 퇴직 공직자의 불법·부당한 전관예우에 대한 엄정한 대응을 지시한 겁니다. 응당 해야 할 조치인 건 분명하지만, 뜨거운 현안이 아닌데 갑자기 비서실장까지 등판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퇴직 공직자의 재취업을 유독 '칼날 심사'한 4월 결과가 공개된 직후였던 터라, 연결해서 해석하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이제 관전 포인트는 이달 말쯤 나올 5월 취업 심사 결과입니다.
5월도 4월처럼 탈락률이 높아진다면, 기조의 변화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4월이 우연한 특잇값(아웃라이어)이란 설명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퇴직 공직자에 대한 전관예우는 뿌리 뽑을 대상입니다. 동시에 민관의 전문가 교류를 무작정 틀어막을 수도 없습니다. 어느 한쪽 손을 쉽게 들어주기 힘든 고민거리입니다.
다만, 퇴직 공직자의 재취업 문턱이 높아지면, 공직 사회가 술렁이는 건 분명한 현실입니다.
퇴직 공직자 재취업 '4월 쇼크'는 기조가 달라질 거라는 시그널일까요. 아니면, 우연히 나타난 노이즈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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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범 기자 (jbkim@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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