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 길의 비경… 물 위 산책, 신록이 말을 걸다

박근희여행기자 2026. 5. 9. 00:3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비경 찾아 떠난 여행
이른 아침 대전 대청호 '명상정원'의 풍경은 한 폭의 수묵담채화 같다. 연초록의 신록으로 물들어가는 '나 홀로 나무'에 농담(濃淡)을 달리한 산 능선과 잠에서 덜 깬 듯 잔잔한 물결이 빚어내는 아침의 고요가 마음의 파장을 잦아들게 한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황금연휴가 지나고 여백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즈음 잔잔한 호수와 신록으로 물든 ‘대청호 오백리 길’은 자꾸만 마음이 향하는 곳 중 하나다. 21개 구간, 총 연장 약 250㎞에 이르는 이 길은 대청호반 생태 탐방로이자 순환형 둘레 길로 곳곳에 숨은 비경을 잔뜩 품고 있다. 지난 3월 말부터는 대청호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신종 장비’들이 추가됐다. 충북 옥천 장계관광지엔 친환경 순수 전기 추진 선박(전기 도선)인 ‘정지용호’가, 청주 ‘청남대’엔 모노레일이 오간다. 대청호를 새로운 시선으로 즐기는 여행.

◇대청호 뱃길 가르는 ‘정지용호’

요즘 대청호 오백리 길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것은 충북 옥천 출신 시인 정지용의 이름을 딴 40t급의 배, ‘정지용호’다. 무려 43년 만에 다시 열린 대청호 뱃길을 오가는 배다. 대청호 뱃길은 상수원보호구역과 상수원 수질보전 특별대책지역에 포함되면서 그동안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3월에 정식 운항을 시작한 여객선 '정지용호'가 충북 옥천 장계관광지에서 승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충북 옥천 출신 '향수' 시인 정지용의 이름을 딴 '정지용호'의 주 용도는 주민들을 위한 수상 교통 수단이다. 주민들보단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유람선이 아닌 여객선으로 운항을 시작한 정지용호는 주민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수상 교통수단으로 출발했으나 주민들보단 여행객들이 찾으며 본의 아니게 ‘부캐’(본캐를 보조하거나 다른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곳 선원에 따르면, “운행 한 달여를 맞이한 지난 4월 29일 기준 실제 이용객은 현지 주민보다 여행객이 70% 이상”이다.

오전 9시와 오후 2시 두 차례 장계관광지에서 출항하는 40석 규모의 정지용호는 첫 출항 후 연일 만석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장계관광지 정지용호 매표소 관계자는 “예매 없이 당일 출항 1시간 전부터 현장 매표(편도 일반 8000원·주민 4000원, 신분증 지참 필수) 후 승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평일 최소 1시간 전, 주말에는 2시간 전부터 대기하는 게 다반사”라고 했다. 평일이었던 지난달 29일에도 표를 사지 못해 아쉬움에 발걸음을 돌리는 여행객이 다수 목격됐다. 매주 월요일과 명절 당일 휴무인데다 하루 80명만 허락하는 대청호의 비경을 만나려면 당분간 기동성과 순발력은 필요충분조건이다. 대청호 수위에 따른 운항 노선 변동 가능성도 있으니 방문 전 문의(장계관광지 매표소·043-730-3766) 필수.

◇금강 물줄기 따라 船上 탐방

정지용호 1코스 ‘공식’ 노선은 장계관광지 도선장에서 출발해 ‘주막말’ ‘석탄리’ ‘오대리’를 거쳐 연주리 도선장까지 21㎞ 구간이다.“종점은 대청호 수위에 따라 수시 변경될 수 있다”는 게 옥천군 선박운영팀 관계자의 말이다. 시속 15㎞, 8노트의 속도로 달리는 배는 장계관광지 도선장을 벗어나 마치 물 위를 스르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친환경 전기 도선인 정지용호는 진동이나 소음이 크게 느껴지지 않고, 선박 운항 시 기름을 연소시키며 발생하는 매연도 없다. 승선감은 서울의 ‘한강 버스’와 비슷하다. ‘장계대교’를 지나니 창밖으로 대청호의 푸른 물결과 그동안 먼발치에서만 바라봐야 했던 호숫가 마을이 슬며시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유람선이 아니기에 배에선 관광지 안내나 해설 방송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연주리 종점 기준 편도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승선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봉인 해제된 듯 눈앞으로 이어지는 비경 덕분이다. 선착장에 닿거나 배가 흔들릴 때를 제외하곤 선미로 나가 풍경을 실컷 감상할 수 있다. 강 냄새를 맡으며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수변을 채운 신록과 눈높이를 나란히 한다. 배는 금강의 물줄기를 가둬 만든 대청호 물길을 따라 순항한다.

정지용호 선미에 나가면 풀냄새와 강냄새가 섞인 5월의 대청호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다. 8노트로 달리는 친환경 선박인 배는 소음이 적고, 매연도 없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배를 타고 가다보면 '향수호수길'이 보인다. 멀리 탐방객들이 배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한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장계관광지를 떠나온 정지용호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주막말’이다. 나루터에 주막이 있었다고 해 ‘주막마을’ ‘주막말’이라 불렸다는 곳. 마성산쯤에선 잔도(棧道·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처럼 보이는 수변 목책로가 눈에 들어온다.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를 모티프로 한 트레킹 코스 ‘향수호수길’에 속하는 구간이다. 길을 걷던 이들이 호수를 가르는 배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자 배에 탄 이들도 손을 흔들어 화답하는 정겨운 광경. 선실에선 한 승객이 창밖을 보며 “와! 저런 곳에 절이 있나 봐!” 하자 일제히 시선이 승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쏠렸다. 벼랑을 파고든 것처럼 자리한 암자 ‘황룡암’이 있던 기도터라는 곳. 이후 배는 오지 마을로 꼽히는 석탄리와 오대리 도선장에도 잠시 머문다.

'연주리 도선장'이 공식 종점이나 대청호 수위에 따라 오지 마을인 오대리를 종점 삼기도 한다. 배 타고 지나가며 보이는 대청호 수몰 지역에 속한 마을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배편 없이는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 한다”는 오대리 나루터 일대는 일반인의 경우 정지용호를 타야만 가까이 가볼 수 있는 내륙의 섬이다.대청호 수위가 낮아지면 임시 종점 역할을 한다. “현재 예닐곱 가구, 열댓 명이 거주한다”는 마을은 그저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하다. 배는 출항 1시간 30분 만에 공식 종점인 연주리 도선장에 도착한다.

그래픽=송윤혜

◇청보리밭서 ‘밭멍’ 하고 보리밥 한 그릇

왕복 승선권을 끊었을 경우 짤막하게 종점에 내렸다가 20분 정도 후 다시 회항하는 배에 올라야 한다. 연주리는 육지여서 차 타고 조용히 찾기도 하는 곳이지만, 배에서 내리니 어쩐지 어느 섬 마을에 닿은 것처럼 느껴진다. 지형이 마치 연꽃이 배처럼 떠 있는 형상이라 해 이름 붙여진 연주리(蓮舟里)는 둔주봉(등주봉) 아래 있는 마을이다. 배를 닮은 바위가 있었다 해서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배바우(배 바위)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도선장 가까이에 ‘독락정’부터 눈에 들어오니 안 가볼 수 없다. ‘홀로 고독하게 즐긴다’는 뜻의 독락정(獨樂亭)은 조선 선조 때 지어진 정자로 ‘옥천 금강 비경 3선’ 중 하나. 독락정에 앉으면 금강이 내려다보인다. 눈앞으로 전깃줄이 전망 감상에 훼방을 놓지만, 소음이라곤 새소리가 전부인 정자에 앉아 있노라면 마음의 물결도 잔잔해진다. 독락정 옆쪽으로는 둔주봉 ‘한반도 지형 전망대’에 오르는 생태 탐방로가 이어진다. 전망대까지는 여러 선택지가 있는데 거리는 0.8~1.9㎞로 짧아도 왕복 소요 시간이 최소 40분 이상 걸린다.

'연주리 도선장' 가까이엔 옥천 금강 비경 3선 중 하나인 '독락정'이 보인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독락정 부근에서 이어지는 '둔주봉 한반도 지형 전망대'에 오르면 볼 수 있는 옥천 속 한반도 닮음꼴 지형. 옥천 여행 코스 중 하나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시간에 쫓기지 않고 소박한 시골 마을의 봄 정취를 만끽하며 느린 여행을 해보고 싶다면 배는 편도만 이용해 봐도 좋을 일이다. 연주리 종점에선 하루 두 번 정지용호 도착 시각에 맞춰 안남면 지역발전협의회에서 운영하는 마을버스(무료·토요일과 공휴일,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운휴)가 달려온다.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시내버스 정류장인 ‘안남 농협’까지 편하게 갈 수 있다. 차량 고장이나 사정 등에 따라 해당 마을버스 운행 시간이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하자. 연주리 도선장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1.4㎞로 도보 15~20분 정도 걸린다. 마을버스를 떠나보내고 연주리 선착장에서 3~4분만 걸어나가도 광활한 청보리밭이 마중 나온다. 왕복 2차로의 시골길을 걸으며 만나는 푸릇푸릇한 청보리밭은 예상치 못한 ‘보너스’ 같다. 관광 농원으로 조성한 밭이 아니기에 이렇다 할 포토존은 없으나 좁다란 밭길 사이에서 연둣빛 파도가 넘실대는 청보리밭과 마주하고 잠시 ‘밭 멍’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편안해진다.

정지용호의 공식 종점인 '연주리'는 장계관광지에서 차로는 10여 분 거리로 가깝다. 5월의 청보리가 제철을 알린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보리의 계절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청보리' 시기. 땅을 신록으로 물들인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가는 길엔 수선화가 계절을 알리고, 마을의 내력이 담긴 배 바위 조형물도 지난다. 출출할 땐 정류장 맞은편 ‘황제보리밥’에서 보리밥 정식 한 그릇 하고 버스에 오르는 것도 후회 없다. 주인은 “정지용호 운행 후 식사를 하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종종 찾아오고 있어서 브레이크 타임 없이 ‘대기’하고 있다”며 식사를 빠르게 차려 내왔다. 나물 넣어 쓱쓱 비벼 먹는 보리밥이 꿀맛이다. 시골 마을을 거치는 버스는 더디 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다리는 동안 버스정류장 곁에 있는 카페 ‘아는공간 덕분’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나 수제청 에이드 한잔하고 버스에 오르는 코스도 괜찮다.

버스정류장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카페 '아는공간 덕분'. 착한 가격의 커피와 수제청 에이드 등을 마시며 쉬어갈 수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300번 대 시내버스(카드 1650원, 현금 1700원)가 장계 관광지로 돌아갈 수 있는 버스다. 안남농협 탑승 기준, 매일 오전 7시 10분부터 오후 7시 40여 분(막차), 50분~1시간 단위로 운행(옥천버스운송·043-732-7700)한다. 편도 이용객은 정지용호 게시판에 붙어 있는 시내버스 시간표를 미리 참고하자.

◇청남대 모노레일 타고 전망대로

안남농협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17~18분이면 장계관광지 도선장이 있는 ‘장계리’에 닿는다. 버스 하차 후 10분 정도 걸으면 장계관광지다.

짙푸른 대청호를 배경으로 수생식물이 왕성한 호흡을 뽐내는 ‘옥천 수생식물원’과 물 위에 솟아오른 기암절벽 ‘부소담악’이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지만, 다음 ‘좌표’는 대청호 북동쪽에 자리한 청주 청남대(입장료 성인 6000원)다. 모노레일이 더해져 새로운 대청호 전망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청남대 모노레일'은 제1전망대까지 7분 만에 오른다. 마의 640여 계단을 오르지 않고도 편히 올라 탁 트인 대청호를 감상할 수 있다. / 청남대관리사업소

198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간 대한민국 대통령 공식 별장이자 제2 집무실로 이용돼 오던 청남대는 2003년 4월 18일 개방돼 대청호 수변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입장 예약제 폐지로 주차장(무료)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해지면서 탐방객이 더욱 늘었다. “모노레일은 당일 선착순 현장 발권으로 탑승이 가능한데, 오전에 발권하지 않으면 탑승이 어려울 정도”라는 게 매표소 직원의 말이다. 40인승(20인승 2량) 모노레일(입장료 별도 왕복 5000원)을 타면 640여 계단을 올라야 했던 ‘1전망대’까지 단 7분이면 편히 경치를 감상하며 올라갈 수 있다. 전망대에선 가까이 청남대를 비롯해 문의면, 구룡산, 양성산, 대청댐 등 대청호 일대가 파노라마 전망으로 펼쳐진다. “역대 대통령 그 누구도 타보지 못한 모노레일을 탔으니 우리가 더 출세한 것 아니냐?”는 한 탐방객의 우스갯소리에 동행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대통령의 별장이었던 '청남대'. 개방 후 대청호 수변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됐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대청호반을 따라 조성된 약 14㎞ 길이의 산책로와 숲길은 지금 더없이 좋을 때다. ‘화합의 길’ ‘나라사랑길’ 등 이름만으로도 애국심이 샘솟는 듯하다. ‘물멍쉼터’가 있는 ‘초가정’, 녹음이 드리운 메타세쿼이아 숲에 들어서면 시간을 잊는다. 역대 대통령 가족이 머물던 침실과 거실, 청와대 본관을 60% 축소해 만든 ‘대통령기념관’까지 둘러보면 다리가 뻐근해진다.

◇‘사색 맛집’ 명상정원도

대청호 오백리길 21개 구간 중 비경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은 4구간인 ‘호반낭만길’이다. 이 길의 백미는 ‘명상정원’이다. 거리상 청남대보단 장계관광지와 조금 더 가깝다. 대청호 오백리길 탐방지원센터도 부근에 있어서 출발점 삼기 좋다. 계절과 날씨, 대청호 수위에 따라 몽환적인 풍광을 만날 수 있어 드라마와 영화, 뮤직 비디오 촬영 명소로도 등장한 바 있다. 그야말로 ‘사진발’ 명소다.

대청호에 가면 신록이 두 배가 된다. 거울 같은 호수가 비춰내는 '명상정원'의 신록은 대청호의 비경 중 하나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고요하고도 잔잔한 대청호 위로 새가 날아간다. 새도 두 마리, 풍경도 두 개. 데칼코마니 작품이 따로 없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대청호 '명상정원'을 지키는 거위 가족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준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진입로에 기대 없이 발을 들여 수변 탐방로를 따라가다 보면 호숫가쯤에서 반전 풍경이 펼쳐진다. 차곡차곡 시간이 퇴적된 하얀 모래톱과 “나의 계절”이라고 속삭이는 듯 푸름을 자랑하는 ‘나 홀로 나무’, 나무를 그대로 반영해 내는 잔잔한 호수가 조용히 손을 내밀어 사색으로 이끈다. 겹겹이 이어지는 농담(濃淡)을 달리한 웅장한 산 능선과 거울 같은 호수가 빚어낸 찰나의 비경 앞에선 모든 고민이 하찮아진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그네에 앉아 모래밭에 무거웠던 생각을 묻어두고 나오던 길, 조용히 마음의 버튼을 눌렀다. 마인드, 리셋(mind reset)!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