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곰’은 옛말… 둔감한 게 능력이다

남정미 기자 2026. 5. 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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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초예민 사회에서
주목받는 ‘둔감력’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 최택(박보검 분)은 바둑 외에는 모든 것에 둔감한 천재 바둑 기사로 묘사된다. /tvN

이 형용사는 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였다. 감정이나 감각이 무디고, 주변 환경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 상대의 감정이나 반응을 비언어적 맥락, 일명 ‘눈치’로 파악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곰’과 ‘미련하다’가 합쳐진 비속어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모두 ‘둔감하다’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이 말을 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오히려 “둔감한 것이 힘이 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둔감력(鈍感力)이다.

둔감력이란 말을 대중화시킨 건 일본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다. 그는 2007년 일본에서 출간된 저서 ‘둔감력’에서 “둔감한 마음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며, ‘둔감함’에 대한 기존 상식을 뒤집어 놓았다. 한국에선 같은 이름으로 나온 책이 2018년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로 재출간됐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책 둔감력. /교보문고

와타나베에 따르면, 둔감하다는 건 단순히 눈치가 없거나 미련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어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뒤돌아서자마자 잊는 ‘둔감함’이 있으면 몸과 마음을 지킬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한껏 키우고 활짝 꽃피울 수 있으며, 나아가 직장 생활이나 결혼 생활도 잘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긴긴 인생을 살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일이나 관계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는 강한 힘”이라고 둔감력을 설명한다.

책 출간 당시 일본에서 ‘올해의 단어’에 선정될 정도로 반향이 컸던 ‘둔감력’이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출간된 어린이 책 ‘작은 일에도 예민해진다면? 둔감력 기르기’는 제목 그대로 아이들에게 둔감력을 길러주기 위해 기획된 책이다. 치유적 대안학교인 ‘성장학교 별’ 교장이자 책을 기획한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 교수는 “요즘 지나치게 민감하고 예민한 아이들이 학교에 너무 많은데, 이 예민함을 조절할 수 있는 방식을 찾던 중 ‘둔감력’이란 개념을 알게 됐다”며 “‘예민하지 않은 아이가 되자’는 부정적 표현인 반면, ‘둔감력을 발휘해보자’는 긍정적 힘을 발휘하게 해 더 동기 부여가 된다”고 했다.

이 책에서 둔감력은 ‘내 마음속 민감성을 조절해서 작은 자극이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 마음을 편하게 지키는 힘’으로 정의된다. 김 교수는 “둔감력이란 (민감성이) 필요한 일에 둔감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절해야 할 것들, 너무 많은 자극들, 불필요한 자극들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자는 의미”라며 “현대 사회는 너무나 많은 자극이 있어 특히 이런 둔감력이 더 중요해진 시대가 됐다고 본다”고 했다.

민감함과 둔감함은 어느 한쪽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너무 예민해진 사회’가 균형추를 무너뜨리면서 상대적으로 둔감함이 더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작은 행동 하나도 ‘박제’되거나 비난받는 문화, SNS를 통해 훨씬 쉬워진 타인과의 비교, 24시간 연결된 업무 환경 등은 예민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실시간 배달 음식 도착 알림부터 카톡의 ‘읽음’ 표시 등 기술의 편리함 역시 상황이 조금이라도 지체되거나 어긋나면 참지 못하는 ‘저인내성 예민함’을 만든다.

실제 최근 MBTI(성격유형검사)와 더불어 확산한 ‘HSP(Highly Sensitive Person·매우 예민한 사람)’ 테스트 유행은 이런 ‘초예민 사회’를 잘 반영한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중견 기업인 신모(38)씨는 “사소한 일에도 너무 쉽게 영향을 받고 감정이 요동쳐서 힘들었는데, 친구가 한번 이 테스트를 해보라고 하더라”며 “검사 결과 ‘초민감자’라고 나와, 내가 평균보다 훨씬 예민한 사람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다만 ‘둔감함’을 오·남용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작가 와타나베는 “둔감력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때때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도 생기더라”며 “예컨대 문제를 일으킨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하게 행동하는 정치인을 ‘둔감력 있는 정치가’라고 표현한 기사를 접한 일도 있다”고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은 둔감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도덕적으로 둔하고 무책임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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