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약소국이어도, 세계인이 ‘헌트릭스’에 열광했을까

2026. 5. 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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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경제력과 대중문화
2025년은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데헌’은 지난해 6월 개봉 이후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시청자가 역대 가장 많이 본 영화에 등극했고, 202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2개 부문을 수상하며 한국 문화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영화 ‘케데헌’의 포스터. [사진 각 영화사]
‘케데헌’은 한국계 캐나다인 감독이 일본계 미국 제작사에서 만들었으니 ‘한국 영화’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한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요 사건들이 한국을 배경으로 벌어지고, 한반도에 존재해 온 무속신앙과 무당을 현대 한국의 아이돌 걸그룹과 절묘하게 결합시켜 주인공의 서사를 만들었다. 악역인 보이그룹은 검은 도포에 갓을 쓴 저승사자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외에도 한국 전통 민화의 캐릭터, 한옥과 기와지붕, 명동거리와 남산타워, 컵라면 등 한국적 요소가 영화 곳곳을 채우고 있다.

대중문화의 국제적 영향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을 반영한다. ‘케데헌’ 같은 한국적 영화의 성공은 2025년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세계 14위를 차지한 선진국이라는 것과 관계가 깊다. 물론 작고 가난한 나라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고 각종 영화제를 휩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글로벌 시청횟수 1위’ 수준의 열광적 반응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경제력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대한 지구촌 사람들의 인식도 중요하다. ‘케데헌’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악령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만약 한국이 주변국에 툭하면 싸움이나 걸고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나라였다면, 이렇게 한국인이 선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헌트릭스’의 소녀들이 남산에서 ‘귀마’를 물리치고 ‘혼문’을 완성할 때, 그래서 우리가 ‘국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때, 다른 나라의 시청자들은 최소한 “한국인이 세상을 지키다니, 말이 돼?”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결국 특정 국가의 문화콘텐트가 전 세계적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 나라의 문화가 널리 알려져 있어야 하고, 그 나라 국민이 ‘우리 편’이라는 개연성을 시청자들이 납득해줘야 한다. 20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준 절대적인 영향력도 미국 경제의 압도적 규모가 그 출발점이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GDP 규모 면에서 세계 1위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그러니 운석이 지구로 날아와도, 거대한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심지어 외계인이 침공해도 언제나 이를 막아내고 인류를 구하는 것은 미국인 주인공인 것이다. 그 영웅이 평범한 소시민이든, 군인이든, 괴짜 천재 과학자든 간에. 작은 나라 부탄의 국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는 있겠으나,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의 우주선을 부탄의 과학자가 첨단 로봇을 조종해 막아내는 영화는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케데헌’은 이번에 이런 개연성의 장벽을 넘어선 것이다.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경제 규모 면에서 미국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동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2위가 누구냐’에 쏠렸다. 1980년대까지 이런 관심의 중심은 단연 일본이었다. 1945년 패전국이 되었다가 1968년에 GDP 규모 세계 2위로 뛰어오른 기적적인 경제 부흥. 글로벌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30개 이상이 일본 기업이던 시절. 닛케이 평균주가가 1989년 12월 버블 붕괴 직전에 기록했던 최고치에 다시 도달하는 데는 34년이 넘게 걸렸다.

일본 경계심에 ‘플라자 합의’…엔화 절상
‘떠오르는 태양’의 포스터. 한쪽에서는 한국 문화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 다른쪽에서는 일본 문화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드러난다. [사진 각 영화사]
그런데 미국 사람들이 일본에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일본 기업들이 미국에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을 수출해 얻은 흑자를 가지고 미국 부동산이나 금융자산, 브랜드 등을 계속 사들였기 때문이다. ‘미국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실패하더니, 이제는 경제적으로 미국을 야금야금 먹겠다는 것인가’하는 경계심이 들 만도 했다. 자연스럽게 소설이나 영화 등에도 이런 감정이 묻어났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백투더퓨처 2’에 나오는 미래 사회의 모습에서는 일본풍이 물씬 느껴진다. 백인 형사가 젓가락으로 우동을 익숙하게 먹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제목부터 일본 국기를 염두에 둔 소설 ‘떠오르는 태양’은 마이클 크라이튼이 1992년에 발표한 작품인데, LA에 있는 나카모토 타워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일본 대기업의 미국 본사 건물에서 살해된 백인 여성. 미국 경찰의 수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일본인들. 일본 문화를 매우 깊이 이해하는 미국 경찰…. 80년대 미·일 관계의 단면들이 잘 드러난다.
1985년 엔화 가치를 급격히 절상시킨 ‘플라자 합의’ 현장의 G5 재무장관들. [중앙포토]
결국 이런 경계심이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ccord)’를 만들어냈다. 뉴욕시 플라자 호텔에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일본 등 5개국 대표가 모여서 논의를 한 끝에 미국 달러를 절하시키자는 합의서에 서명했는데, 미국 달러 절하보다는 사실 일본 엔화의 절상이 주된 목표였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계속 치고 올라오는 일본 경제를 ‘눌러버릴’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합의의 결과로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일본의 수출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는데 동시에 엔화의 구매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그렇다 보니 ‘케데헌’을 만든 소니는 이 무렵 미국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영화사를 사들여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었고, 록펠러 센터도 일본 기업에 넘어갔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불균형한 트렌드, 즉 수출산업과 실물경제가 약해지는 와중에 금융 및 부동산 자산만 극단적으로 커지는 상황이 일본 국내에서는 버블경제를 키웠고, 1989년 버블이 터지면서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었다.

2010년부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된 중국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일본과 달리 중국이 ‘굴기’해서 경제 대국이 되겠다는 목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직접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거나 충돌하는 상황을 그려낸 것이 더 많다. 비소설 부문에서는 2015년에 출간된 마이클 필스버리의 『백 년의 마라톤』이 유명했다. 1949년 중국 공산정부가 세워진 후 100년이 되는 2049년을 목표로, 중국이 다시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얼마 전에는 아예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여 세계대전으로 확대된다는 『2034 미·중 전쟁』이라는 소설까지 나왔다.

인도가 강대국 되면 ‘007’의 적국 될 수도
이렇게 직접적인 갈등을 그린 것 말고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으로는 『삼체』라는 소설이 눈에 띈다. 세 권짜리 대작이지만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태양 같은 항성이 세 개 돌아가는 곳에 존재하는 지적인 생명체가 지구의 존재를 알고 인류를 절멸시키려고 하는데 거기에 인류가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어느 인터뷰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백악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사소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해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최고의 SF소설에 주어지는 휴고상을 2015년에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지은이가 중국인이고 주된 등장인물들이 모두 중국인이라는 점이다. 중국인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소설의 개연성도 이제는 납득이 된다는 얘기다.

현재의 추세가 이어진다면 인도의 경제 규모가 곧 일본을 추월할 전망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 같은 스파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맞서야 하는 적국이 인도로 묘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은 어떨까. 경제 규모가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케데헌’처럼 세상을 구하는 주인공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아니면 경계하고 눌러버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될까.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주변의 사회문화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SERICEO에서 5년 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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