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한 집 대신 감옥행 선택, 억만장자의 ‘이유있는 저항’

유상철 2026. 5. 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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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차이나 워치] 홍콩 민주주의 상징 지미 라이
지미 라이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홍콩 민주화 시위에 직접 참여해 왔다. 2014년 11월 11일 홍콩의 우산혁명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기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팔순이 코앞인 억만장자는 왜 안락한 집 대신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감옥을 택했나. ‘선택’이라 말하는 건 그에겐 분명 피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 저항의 상징 지미 라이(黎智英) 이야기다. 우리에겐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 창업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운명이 내주 지구촌의 두 강자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회동 때 또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지난 2월 20년 징역형…96세 돼야 만기출소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한 지미 라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78세의 지미는 지난 2월 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앞서 2년 복역한 것을 빼면 앞으로 18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만기 출소 때 나이는 96세. 사실상 종신형에 가까워 그가 과연 두 발로 감옥을 나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에 트럼프는 그의 석방을 요청할 예정이다. 대신 2019년 홍콩 시위 때 중국에 가한 제재를 풀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왜 그는 홍콩의 모든 부호가 머리를 숙일 때 홀로 고개를 들었나. 그의 삶 궤적에서 답을 찾아보자. 일각에선 그가 1947년생이라 한다. 영국 여권에 그렇게 기재돼 있다는 거다. 그러나 48년생이 맞다. 중국에서 홍콩으로 밀항해 소년공으로 일할 때 취직을 위해 나이를 올려 적었다. 쿵후 스타 이소룡(李小龍)이 태어난 광둥성 순더(順德) 출신으로 아래 쌍둥이 여동생을 뒀다.

할아버지는 광둥성에서 유일하게 롤스로이스를 굴린 부자였고, 아버지 또한 성공한 상인이었다. 그러나 대륙의 공산화와 함께 집안은 몰락했다. 자살까지 시도했던 부친은 네 살 먹은 그에게 “너는 큰일을 할 것”이란 말만 남기고 52년 홍콩으로 피신했다. 어릴 적 그는 친어머니를 ‘작은 엄마(二媽)’라 불렀다.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첫 부인은 부유한 집 출신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첫 부인을 살리려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그렇게 해야 첫 부인의 혼령이 둘째 부인의 몸에 깃들 수 있다는 속설 탓이었다. 그의 유년은 비참했다. 어머니가 농민 출신임에도 곧잘 비판 투쟁에 끌려나갔다. 부잣집 며느리에 홍콩으로 도망간 남편을 둔 죄로 ‘계급의 적’이란 낙인이 찍힌 것이다. 대중 앞에 무릎을 꿇은 어머니가 온갖 조롱을 당하는 모습을 그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지켜봐야 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가슴팍을 적셨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부끄러워 오장이 타는 듯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도 할머니는 전혀 굴하지 않고 옛날이야기를 해 주며 말미엔 언제나 “뭘 해도 사장이 돼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가까스로 5년 기초 수업을 마친 그는 거리로 나섰다. 남이 피우다 버린 담배를 주워 남은 연초를 다시 말아 팔기도 했지만 주로 광저우 기차역에서 짐을 날랐다.

12세 때 운명의 초콜릿 사건이 터졌다. 한 승객이 먹다 남은 걸 줬는데 한입 무니 완전 별세계의 맛이었다. 이게 뭐냐 물으니 ‘초콜릿’, 댁은 어디서 왔냐 하니 ‘홍콩’이란 답이 왔다. 이제까지 먹은 것 중 들쥐가 가장 맛있다고 여기던 그는 그런 황홀한 맛을 가져온 홍콩은 반드시 천당(天堂)일 거라 생각했다. 이듬해인 61년 그는 홍콩으로 밀항한다. 목표는 단순했다. 돈 벌어 부자가 되는 것.

스웨터 공장에서 먹고 자며 악착같이 일한 끝에 21세엔 직원 300여 명의 생산 경리가 됐다. 대신 오른쪽 무명지 손톱 부분이 잘리고 기계 소리에 한쪽 귀가 먹었다. 그는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홍콩에서 성공한 사람을 보니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던 거다. 지미라는 영어 이름도 얻었다. 75년엔 자신의 공장을 세웠다. 공명(公明)직조창이다. 사업차 뉴욕을 방문한 77년 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친 일이 생긴다.

미국 지인의 집에서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하이에크의 저작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을 접한 것이다. 책은 자유시장경제가 사회정의를 표방하는 국가주도의 정책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만일 자유시장경제가 파괴되면 국민은 국가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란 경고가 따른다. 이후 그의 독서 목록은 속성으로 부자가 되는 법에서 하이에크의 모든 도서, 나아가 전체주의의 위험을 논하는 칼 포퍼의 서적으로 확대된다.

자유에 대한 확고한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도 당시엔 아직 의류 사업이 주였다. 81년 지오다노를 세운다. 최신 트렌드를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하는 그의 패스트 패션 전략은 80년대 중산층의 소비 굴기에 맞춰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유니클로의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가 84년 홍콩에 와 그로부터 경영 방식을 배웠다. 89년 천안문 사태는 그의 인생에 큰 분수령이 됐다.

천안문 광장에 모인 학생들의 외침에서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부름을 듣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오다노 셔츠에 왕단과 차이링 등 학생 지도자의 얼굴을 새긴다. 패스트 패션에 이어 중식(中食)의 패스트푸드 영역으로 사업을 넓히려던 그는 방향을 바꿔 90년 주간지 넥스트 미디어(壹周刊)를 창간한다. 그가 중국 당국에 요시찰 인물로 오른 건 94년이다.

천안문 사태 유혈 진압의 주역으로 알려진 리펑 총리가 그해 여름 독일을 방문했을 때 마침 유럽에 있던 그는 리펑을 “IQ 제로의 XXX”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다. 격분한 중국 당국이 베이징과 상하이의 지오다노 점포 단속에 나서자 그는 지오다노 회장에서 물러나며 지분을 판다. 그리고 그 돈으로 95년엔 일간지 ‘애플 데일리(頻果日報·빈과일보)’를 창간한다.

트럼프, 시진핑과 회담 때 석방 요청할 듯
홍콩 애플 데일리가 폐간 직전 마지막으로 찍은 2021년 6월 24일자 신문. [연합뉴스]
그가 미디어 사업에 뛰어든 건 미디어는 정보를 전하고, 정보는 선택을 뜻하며, 선택은 자유라는 생각에서다. 2001년과 2003년엔 대만에서도 각각 대만판 넥스트 미디어와 애플 데일리를 발행했다. 홍콩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았고 권력 또한 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최루탄을 맡아가며 자리를 함께했다.

특히 2019년 홍콩에서 터진 중국으로의 범죄인 송환 반대 시위 때는 전면에 섰다. 미국을 방문해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만나 홍콩 시위 사태를 토론하고, 애플 데일리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홍콩을 구해달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이게 20년 징역형의 바탕이 된 건 물론이다. 중국은 2020년 6월 홍콩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법은 국가 분열, 정권 전복, 테러, 외세 결탁 등 4대 범죄에 대해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가 체포돼 이 법의 처벌을 받을 건 자명했다. 영국 여권을 갖고 있고 런던과 파리·교토·타이베이 등에도 집이 있으며 재산이 무려 12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는 끝내 홍콩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2020년 12월 31일 붙잡혀 이제까지 독방에 수감돼 있다. 그는 국가보안법 통과 이후 체포될 때까지 5개월여 시간이 있었지만 홍콩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남아야 한다. 떠나는 건 잘못이다. 너무 나약하다. 홍콩은 내게 모든 걸 준 곳”이라는 게 그의 답이다. 그는 법정에서도 외세와의 결탁을 부인하며 자신은 홍콩의 가치 즉 “법치와 자유, 민주주의,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웠을 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는 똑똑한 사람(聰明人·총명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성공하면 물러나고(功成身退·공성신퇴) 정치는 멀리한다(遠離政治·원리정치)는 처세를 거부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자본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는 것 또한 거부했다. 타협을 통해 생존을 취하는 묵계도 거부했다. 신념을 부인함으로써 관대한 처분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결과를 바꿀 수 없을지라도 여전히 내가 선택한다는 것이다. 선택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이게 독재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다. 독재 자체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사람 중에는 여전히 길들여지기(馴化·순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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