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그럴 줄은” 25세 천재였는데…남의 아내와 부정행각, 대가는 묵직했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리하르트 게르스틀 편]
‘도발적’ 사상, 파격적 예술가의 형태
부정의 책임은 크고 대가는 묵직했다
스물다섯살, 몰락끝에 사라진 잠재력
![작자미상, 리하르트 게르스틀(섬네일용 일부 확대), 1902 [Otto Breicha Archive , schirn.de/en _ commons.wikimedia.org (Public Domain)]](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28408durq.png)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자화상(일부 확대), 1904~1905, 캔버스에 유채, 159.5x109cm, 레오폴트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 commons.wikimedia.org]](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28689wlmd.png)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는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에는 과묵한 신사였다. 또 어느 날에는 언제 터질지 모를 환자였다. 그는 늘 무언가를 생각했다. 온갖 상념에 파묻혀있기를 즐기는 듯했다. 그런 한편, 덩치를 불린 걱정과 불안 따위에 어느덧 짓눌려있기도 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드물었다. 책과 술, 그림과 음악 정도만이 닫힌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관심을 끌었다고 해도 그뿐.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는 일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몇 마디를 나누다 보면 이내 눈을 치켜뜨곤 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 중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회귀와 발전 중 무엇도 갈망하지 않았다. “의미 따위는 없어요.” 그는 낮게 중얼거리곤 했다. “다 깨부숴버려야 해요.” 이렇듯 종종 ‘파괴’ 내지 ‘해체’와 같은 강한 언어도 덧붙였다. 그 와중에 뜬금없이 부러진 싸구려 붓, 방금 먹은 음식 계산서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불안하고, 위험하고, 참을 수 없이 하찮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남달랐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웃는 자화상, 1908,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벨베데레 [digital.belvedere.at / commons.wikimedia.org]](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29124dyzp.jpg)
풍성한 숱에 짧은 머리칼. 퀭한 얼굴.
그는 웃고 있다. 이가 훤히 보일 만큼 웃고 있는데, 어딘가 어긋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도 두 눈. 그 안에는 눈물이 고였다. 볼과 귀는 붉게 타오른다. 긁어내듯 칠한 것 같은 새빨간 색채. 이 때문인지, 환희보다는 광기가 더 빨리 피어나는 듯도 하다. 제멋대로 자른 눈썹과 수염은 삭막한 기운을 끌어모은다. 흩뿌린 톱밥 같은 배경도 혼탁한 분위기만 더 얹는다. 이것은 그가 그린 그림, <웃는 자화상>이다. 작품도 이런 식이었다. 웃고 있지만 끝내 남는 감정은 씁쓸함이 더 크다. 펴바르는 붓질조차,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조차도 위태롭고, 혼란스럽다.
![작자미상, 리하르트 게르스틀, 1905 [Otto Breicha Archive , schirn.de/en _ commons.wikimedia.org (Public Domain)]](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29481yuwr.jpg)
시작은 그저 이러한 기인에 대한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어딘가 위태로운 이를 바라볼 때 생기는 이해할 수 없는 연민.
마틸데는 그를 떠올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본인도 그런 본인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정의 회오리는 가슴 한복판에서 휘몰아쳤다. 그녀는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빠져들고 있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남자에게. 두 사람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불길로 함께 발을 내밀고 만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마틸데 쇤베르크와 딸, 1906, 캔버스에 유채, 160.5x108cm, 벨베데레 [digital.belvedere.at / commons.wikimedia.org]](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29820rkvx.jpg)
1906년의 어느 봄날. 마틸데는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처음 인사할 수 있었다. 당시 마틸데는 스물아홉, 게르스틀은 이보다 여섯 살 어린 스물셋이었다.
마틸데가 본 게르스틀의 첫인상은 역시나 좋지 않았다. 그는 왠지 껄렁했고, 어딘가 뻣뻣해보였다. 외투와 바지 밑단에선 먼지 냄새가 폴폴 올라왔다. 그 유명한 빈 예술 아카데미 출신의 수재라고 하지 않았는가. 딱히 그렇게 보이지는…. “이 친구가 오늘부터 우리에게 그림을 가르칠 거야.” 마틸데의 남편, 아놀드 쇤베르크가 게르스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게르스틀은 그제야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이런 만큼 그녀 또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 쇤베르크와 마틸데 부부가 게르스틀을 집으로 부른 이유. 말 그대로 ‘미술 과외’ 때문이었다.
부부는 그에게 그림을 배울 생각이었다. 그런 뒤 화폭을 채워 적당한 값에 팔아넘길 마음이었다. 당장 오늘을 먹고 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서른두 살의 쇤베르크. 그는 도발적 성향의 음악가였다. 일찌감치 추종자를 모으고 있었지만, 아직 대중적 인기는 끌지 못하는 비주류 예술가였다. “재능은 있지만, 음표와 악보만 갖고선 돈을 벌 수 없는 사람.” 당시 일각에서 도는 평이었다고 한다. 그가 20세기 현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건 훗날 일이었다.
게르스틀은 이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각각의 초상화부터 그려줬다. 두 사람 모두 캔버스 안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게르스틀은 그렇게 부부의, 보다 정확히는 마틸데의 일상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아놀드 쇤베르크, 1905~1906년경, 캔버스에 유채, 182x130cm, 빈 박물관 [commons.wikimedia.org]](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0239ygcb.jpg)
쇤베르크와 마틸데 부부는 왜 굳이 게르스틀을 과외 선생으로 불렀을까. 딱히 사교적이지도, 붙임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를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
쇤베르크는 믿었다. 본인의 독창적 음악이 곧 세상에 파동을 안길 것으로 믿었다. 그런 만큼, 그는 게르스틀의 독창적 미술 또한 언젠가 세상에 새로운 색채를 끼얹으리라고 확신했다. 천재성과 잠재력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당장은 인정받지 못하는 둘. 이러한 동질감이 서로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게르스틀의 상황도 썩 좋지 못했다.
게르스틀이 빈 예술 아카데미 출신인 것은 맞았다. 그곳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명문 교육기관이었다. 1883년생인 그는 이 기관을 열다섯 나이로 입학했다. 부유한 상인 집안이라는 배경도 있었다. 그는 탄탄한 기본기도 가졌다. 속도감 있는 붓질, 색채의 분석과 조합에서는 특히나 독보적이었다. 상상력, 아울러 창작 중 종종 있어야 할 격정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꽤 괜찮은 주류 예술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 리라를 든 폴리힘니아(그리스 신화의 뮤즈), 1892, 종이에 수채, 46x26cm, 개인소장 [Dorotheum / commons.wikimedia.org]](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0604vtjw.jpg)
![구스타프 클림트, 입맞춤, 1907~1908, 캔버스에 유채, 180x180cm, 벨베데레 [Google Art Project / commons.wikimedia.org]](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0961btpg.jpg)
하지만 게르스틀 또한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게르스틀은 그때부터도 남다른 사상가였다. 그는 지도 교수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우선 옛 그림부터 베껴보라”는 보수적 가르침을 차마 따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구스타프 클림트로 대표되는 ‘분리파(Secession·과거 예술 양식에서 분리를 꾀하는 파)’에 동참했는가. 딱히 그럴 마음도 없어보였다. 그는 전자를 앞뒤 막힌 기득권으로 봤다면, 후자는 진보의 탈을 쓴 장사꾼 정도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 게르스틀은 철저한 주변인이었다. 알아서 늪에 빠진 돌연변이였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 캔버스에 유채, 65x54cm, 오르세 미술관 [Google Cultural Institute / commons.wikimedia.org]](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1342ajrz.jpg)
게르스틀은 새로운 회화 세계를 추구했다.
그는 보이는 겉모습만 그대로 옮겨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 분리파 클림트의 그림처럼 장식성을 극대화할 욕망도 없었다. 그림이란 대상의 가장 깊은 곳, 어쩌면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는’ 속마음까지도 담아내는 영혼의 창이 돼야 한다는 것. 그의 믿음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언젠가 그의 광기 묻은 작품을 보고 이 신념을 더 강하게 굳혔다. 결과적으로, 게르스틀은 3년 만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나왔다. 또 언젠가는 클림트와 같이 그림을 전시할 기회를 맞았지만, 이 또한 “그 사람 특유의 장식적 기법이 싫어서” 제안을 거부했다.
게르스틀은 이후 체코와 그 주변 지방을 돌며 견학 길에 올랐다.
언어, 문학, 철학에 음악까지 홀로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특히나 여행 중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글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의 도발적 성향은 당시 예술계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기존 질서의 해체, 내면에 대한 더 깊은 집착과 천착을 바란 회화관은 폭탄 또는 테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쇤베르크라는 음악계 이단아가 미술계 이단아를 ‘귀신처럼’ 알아본 격이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쇤베르크 가족, 1908, 캔버스에 유채, 109.7x88.8cm, Mumok [richardgerstl.com / commons.wikimedia.org]](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1787xpxs.jpg)
마틸데도 신기했다.
남편 쇤베르크도 분명 보통내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릴 적 짧은 시절을 빼면, 그도 사실상 독학으로 지금껏 음악 주머니를 채운 사람이었다. 그만큼 자기 세계가 확실했다. 한편으로는 한없이 까다로운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부부의 미술 교사가 된 게르스틀만 보면 미소를 지었다. 이 어린 청년의 까칠한 회화관에 “옳은 말이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는 자네의 것일세”라며 띄우기도 했다. 그의 일거리를 대신 낚아오는 등 조력자로도 직접 나섰다. 그런가 하면, 쇤베르크는 이른바 ‘쇤베르크 서클’에 게르스틀을 정식으로 부른 적도 있었다. 그곳은 그와 뜻이 맞는 학자와 음악가 등으로 꾸려진 일종의 예술 연대였다. 이 또한 대단한 호의였다.
마틸데는 쇤베르크와 게르스틀 사이 싹트는 우정을 지켜봤다.
기묘한 호기심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연민이었다. 그러다 둘의 대화에 끼어들고, 셋이서 차를 마시고, 어느 날부터는 쇤베르크를 뺀 둘이서도 이야기를 하고, 언젠가부터는 선약이 잡힌 쇤베르크 대신 둘만 함께 전시회를 가고…. 남녀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문제는, 애정을 느낄 만큼 너무 가까워지고 말았다는 것.
![리하르트 게르스틀, 쇤베르크 가족과 함께한 단체 초상화, 1907, 캔버스에 유채, 169x110cm, 쿤스트하우스 추크 [commons.wikimedia.org]](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2200pyjk.jpg)
당장 마틸데부터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당한 것 같았다. 매혹과 혐오가 뒤섞인 나르시시스트에게, 빠져들기보다는 아예 낙하해버린 느낌이었다. 게르스틀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그림. 그의 그림은 점점 더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의 캔버스 앞에 서면 낙엽과 타다 만 장작, 공동묘지 따위가 떠올랐다. 어쩌면 마틸데는 애정과 위험의 감정을 혼동했을지도 모른다.
1908년의 여름. 쇤베르크와 마틸데 부부는 오스트리아 트라운 호수 인근, 온천 마을 그문덴에서 휴가를 즐겼다.
‘쇤베르크 서클’도 그곳에 모였다. 게르스틀 또한 가장 자리에서 주뼛대고 있었다. 마틸데는 설렜다. 모처럼 맞은 휴양도, 올 듯 오지 않을 듯한 그 사람의 존재도 반가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주황색 햇빛 아래서 오늘날 예술을 논했다. 세기말 분위기의 잔향도 음미했다. 산책을 하고, 따뜻한 물 속에서 마음도 녹였다. 쇤베르크는 그 틈에서 곡을 쓰고 있었다. 자세히는 <현악 사중주 제2번>의 마지막 세 악장을 매듭 짓고 있었다. 이는 훗날, 그가 무조성(無調性·정해진 조성이 없이 연주되는 곡)의 영역으로 도약하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그렇게 새로운 성취에 마침표가 찍힌 무렵이었다. 쇤베르크는 다른 이유에서 재차 감정의 휘몰아침을 마주했다. 기분 좋은 고양감과 함께 숙소 문을 연 순간, 마틸데와 게르스틀이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둘은 곧, 그대로 도망쳤다. 호텔에서 하루, 그다음은 빈 북부 외곽에 있는 하숙집에서 사흘간 머물렀다. 그 사이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체적으로 무슨 행각을 벌였는지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나버렸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마틸데 쇤베르크, 1907, 캔버스에 템페라, 95x75cm, 벨베데레 [digital.belvedere.at / commons.wikimedia.org]](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2574iyml.jpg)
다만, 마틸데와 게르스틀의 도피는 허무한 최후를 맞았다.
마틸데는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얼마간은 게르스틀의 작업실을 찾긴 했다. 이 또한 얼마 안 가 발걸음을 아예 끊었다. 마틸데의 위험한 감정을 꺾은 건 “두 자식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식혀야 한다”는 조언이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게르스틀은 위태로웠던 밀회 기간, 마틸데의 누드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들판의 커플, 1908, 레오폴트 미술관 [Google Art & culture / commons.wikimedia.org]](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2981ounj.jpg)
게르스틀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게르스틀이 <웃는 자화상>을 그린 건 이 무렵이었다.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웃고 있지만 괴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웃고 있지만 요동치는 허무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러니까, ‘그림은 대상의 내밀한 밑바닥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뼈저리게 구현한 작품인 셈이다.
결과적으로는 쇤베르크의 안목이 맞았다.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의 깨달음을 얻었다. 게르스틀은 표현주의(expressionism·영혼의 표현을 나타내는 데 주력하는 양식)의 영역으로 찢듯이 들어가 발을 크게 뻗었다. 물론,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남녀간 돌발 사건이 있었지만.
게르스틀은 성취와 별개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고립이었다. 마틸데는 이제 게르스틀을 보지 못했다. 쇤베르크, 그리고 ‘쇤베르크 서클’ 사람들 또한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는 식의 말과 함께, 게르스틀과의 접촉을 사실상 멈췄다. 게르스틀은 또 혼자였다. 혼자인 건 익숙했다. 하지만 내몰리고 내쳐진 채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정의 골이 깊었던 만큼 부메랑도 묵직할 수밖에 없었다.
격동의 여름이 흘러갔다. 가을 또한 푸르게 무르익고 있었다.
문제의 그해 11월 4일. 마틸데는 게르스틀이 세상과 등졌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그의 작품과 기록 등 상당수도 불에 탄 채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덧붙었다. 때마침 쇤베르크 주최의 공연 날이었다. 게르스틀만은, 초청장을 받지 못한 그날이었다. 당시 게르스틀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도나우 운하에서, 1908, 캔버스에 유채, 63x47cm, 레오폴트 미술관 [commons.wikimedia.org]](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3286ywhu.jpg)
알아서 사막 위에 뿌리 내린, 자처해 위태롭게 피어난 야생화는 허무한 몰락을 맞고 말았다.
게르스틀은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전시회를 열지 못했다. 그랬던 그는 1930년 초, 죽은 뒤 20년이 더 흐른 후에야 겨우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다. 그의 혈육이 화마를 겨우 피한 몇 안 되는 작품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의 사건’과 별개로, 게르스틀의 그릇은 이 정도 미래는 돼야 품을 수 있었다. 반항아가 아닌 일찍 온 천재이자, 오스트리아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뒤늦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가 존경했던 몇 안 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비슷한 흐름을 맞은 격이었다. 오죽하면 “그는 오스트리아의 반 고흐였다”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리하르트 게르스틀, 칼렌베르크행 철도, 1907, 캔버스에 유채, 56x69.5cm, 벨베데레 [commons.wikimedia.org]](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8/ned/20260508235233647lphc.jpg)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마틸데는 죽기 전까지도 게르스틀의 묘지를 계속 찾았다고 한다. 가끔은 남편 쇤베르크도 함께 오곤 했다고 한다.
마틸데와 쇤베르크는 이후에도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다만, 마틸데는 긴 세월 우울증에 시달리는 등 이후로도 그저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쇤베르크는 문제의 도피 사건에 대한 감정을 음악극 <행복한 손> 등에 녹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틸데는 1923년에 부신암으로 숨졌다. 향년 마흔여섯 살이었다. 게르스틀이 죽고 15년이나 더 흐른 시점이었다. 이보다 더 오래 산 쇤베르크는 1951년에 영영 눈을 감았다. 일흔일곱 나이로 그 시절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이들과 삶의 길을 나란히 걷지 못한 게르스틀. 그의 때이른 마지막은 어땠을지를 끝으로 한 번 더 곱씹게 된다.
격정과 광기로 웃고 있었을까, 허무와 후회로 울고 있었을까. 아니면, <웃는 자화상>의 모습 그대로 웃으며 울고 있었을까. 그의 길은 많은 순간 위태롭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끝내는 더, 여러 지점에서 안타까운 여정이었다.
Zachary Small,The Short, Scandalous Life of Austria‘s Most Tortured Artist)., Artsy
H. H. Stuckenschmidt., Schoenberg: His Life, World and Work., Macmillan Publishers
http://www.richardgerstl.com/gerstl-a-life-in-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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