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 부활하나
학벌 임금 차별 해소.. 고졸·대졸 동일 임금 합의
직무 중심 채용 확산…학벌보다 스킬·역량 우선
스펙 게임 끝... '독서·사고력·역량'의 시대 오나
[지데일리] 교육과 자기소개서에 ‘학력 란’이 빛을 발하던 시대가 서서히 저물 전망이다.

EBS는 올해 신입·경력 공개 채용을 진행하며 학력, 학교, 나이를 포함해 학교성적과 토익·토플 등 모든 스펙을 블라인드로 진행키로 했다.
신입 채용에서는 1차 서류전형 자체를 폐지하고, 지원자 전원이 인공지능(AI) 역량평가와 독서능력·문해력 평가를 통과한 뒤 논술작문, 실무역량평가, 임원면접을 거치는 구조로 바뀌었다. 경력직은 1차에 서류평가를 유지하되, 학력·학교 정보는 시스템에서 자동 익명 처리해 평가자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설계돼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학벌에 따른 임금 차별’을 사실상 해소했다는 점이다. EBS는 이번 블라인드 채용을 전제로, 고졸과 대졸 간 기본 임금 차이를 없애고, 고졸 경력자와 동일 경력 대졸자의 임금을 동일하게 맞추겠다는 내용을 노사 상생 협의체에서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는 '학력=연봉'이라는 오래된 공식이 공공기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EBS식 블라인드 채용은 갓 나온 실험이 아니다. 2017년 고용정책기본법에 ‘학력·출신학교로 인한 차별 금지’ 조항이 들어간 이후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블라인드 제도가 도입됐고, 이후 교육·노동단체가 “학벌 중심 채용이 학습지옥·사교육비 폭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취지로 좋은 채용 기업 캠페인을 펼치며 민간에도 확산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공공연구기관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학벌·스펙이 직무 역량의 근사치”라는 논리가 다시 힘을 받으면서 제도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 틈을 뚫고 EBS가 2023년부터 서류전형을 폐지하고 AI 인적성·독서평가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데 이어 2026년에 ‘완전 블라인드’를 선언한 것은, 블라인드 채용이 ‘정부의 명령’을 넘어 ‘기업自身的 선택’이라는 단계로 진입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EBS의 변화는 단독의 사례가 아니라 채용 시장 전체의 흐름과 맞물려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인사 전문 기관들의 조사에 따르면, 채용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직무 중심 채용’, ‘스킬 기반 채용’, ‘수시·상시 채용’ 등으로 요약된다. 이는 “어느 대학에서 몇 점을 냈는가”보다 “어떤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는가”를 묻는 방식으로 평가 기준이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IT 기업과 스타트업, 일부 외국계 기업은 이미 학력·대학 이름을 연관검색어로만 다루고, 실제 채용에서는 코딩 테스트, 실무 과제, 프로젝트 포트폴리오를 중시하는 방식을 써 왔다.
국내 대기업들도 AI를 활용해 인사 업무 전반을 자동화·데이터화하면서, 서류 스크리닝을 넘어 “역량 패턴”을 분석해 인재를 추려내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학벌·나이·학점 같은 정보는 점차 ‘참고 요소’로 가치가 떨어지고, 특정 역량과 성과가 더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블라인드 채용이 인기 몰이하는 데는 한 가지 핵심 숙제가 있다. 고용노동부와 교육단체가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많은 기업이 채용할 때 학력·출신학교를 비공식적으로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에는 ‘학력 차별 금지’가 적혀 있지만 처벌 조항이 없어, 지키든 안 지키든 ‘선의에 의존’하는 구조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EBS는 이 대안으로 AI 역량평가와 독서능력·문해력 평가를 도입하면서, '스펙이 아니라 습득력·사고력·문서 이해력'을 눈으로 보이는 지표로 바꾸고 있다. 이는 지원자에게도 새로운 요구를 만들어낸다.
더 이상 ‘어떤 학교를 졸업했는가’를 강조하는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실제로 읽은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고, 복잡한 맥락을 요약하고, 주어진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미리 훈련해야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EBS 측은 “학벌과 실무 성과 간 상관관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내부 분석을 토대로, 서류전형을 블라인드로 바꾸고 AI 평가와 인성면접을 중심에 두는 채용 구조를 정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우선순위를 봐야 한다면, 학력보다는 '태도와 인성'이라는 강한 인식을 반영한다.
교육과 노동을 연구하는 단체들도 “학벌 중심 채용이 해제되면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 하락의 여지가 커진다”는 점을 반복해 강조해 왔다. 채용이 교육을 끌고 가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점에서, EBS가 블라인드·스킬 중심 채용을 선언한 것은 단순한 기업 내부 변화가 아니라, 학교와 학원·사교육 시장 전체의 전략을 다시 짜게 만드는 힘을 가진 조치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EBS의 완전 블라인드 채용은 양극화된 스펙 게임을 끝내고, 대신 독서·사고력·역량에 접근성을 넓히는 실험"이라며 "이 실험의 결과가 어느 정도로 채용 시장과 교육을 흔들 수 있을지는 이제 기업들의 선택과 법·제도, 나아가 국민의 인식 변화가 함께 결정지어 나갈 중대한 과제로 남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