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 문화 이면] 한쪽짜리 책이 있다고?

살다 보면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할 때가 있다. 두꺼운 책만 펴내기로 유명한 우리 출판사가 한 쪽짜리 책을 냈다. 책 전체가 100쪽도 아니고 10쪽도 아니고 1쪽이다. 시리즈로 기획했는데 이름이 '페이지 원'이다. 편집자가 기획을 했고 내가 승인을 해서 우당탕탕 진행되어 나와버렸다. 심지어 계절별로 1권씩 내기로 해서 현재 2권도 준비 중이다. '2권'보다는 '2호'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책은 대단히 얇고 텍스트도 대단히 짧지만 엄밀히 말해 1쪽은 아니다. 앨범 재킷처럼 생긴 케이스 안에 16쪽 분량의 종이(책)가 차곡차곡 접혀 있다. 펼치면 포스터처럼 넓고 길다. 뒷면엔 저자의 얼굴을 형상화한 일러스트가 들어가고 앞면엔 예사롭지 않은 서체와 디자인으로 본문이 흘러간다. 마치 공들인 예술작품 같다. 이 책은 읽기 위한 것인가.
한 작가가 쓴 글이 떠올랐다. '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서 쓴 글인데 책이 점점 짧아지고 경량화되다가 급기야 네임카드 같은 데 경구로 적히게 된다. 사람들은 그걸 편의점에서 사서 본다. 그러다가 결국 그것마저 버거워지고 재고만 쌓여갈 때 책은 종말을 고한다는 내용이다.

왠지 찜찜했다. 이 한 장이라는 기획이 어쩌면 책의 죽음을 앞당기는 상징적 행보로 읽히면 어쩌지. 텍스트힙이라는 시대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는 면도 있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재밌게 다가왔다. 한번 해보면 어떨까.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새로운 독서 문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됐다.
한 쪽의 책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장치가 필요했다. 저자의 이름을 감추고 책 표지에 있는 은박을 긁으면 드러나게 했다. 은박을 긁기 위한 동전도 동봉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올 2권의 힌트를 여백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책이 게임과 결합되어 있는 셈이다.
이 책은 결코 편하게 읽을 수 없다. 기존의 책은 손으로 잡고 펼치면 편하게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은 읽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전지 크기에 16분할로 되어 있으니 어떤 사람은 열여섯 번 접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세로로 길쭉하게 볼 수도 있다. 벽에 붙여두고 틈틈이 볼 수도 있고, 해가 들어오는 넓은 창에 붙여서 보면 느낌이 색다를 수도 있다. 혹은 이 책은 읽지 않을 수도 있다. 은박에 가려진 저자의 정체도 그대로 비밀로 둔 채 책꽂이에 꽂아둘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읽지 않는 것이 읽는 것이 된다. 누군가는 이 책을 책에 꽂아서 가지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얇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이럴 경우 책을 품은 책이 탄생한다.
형식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포스터는 너무나 흔하고, 브로셔라든지 아코디언북이라든지 여러 가지 형태의 텍스트북이 이미 나와 있다. 그런데 그와는 결이 좀 다르다. 본격적인 철학이 담긴 인문학 책이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집중해서 읽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니 편의성을 중시하고 재미와 직관과 공감에 따라가는 트렌드와도 일정한 거리가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시도도 독자들이 선택을 해줘야 의미가 있다. 책 가격은 싸지 않다. 1쪽짜리 책이 1만5000원이나 된다. 온라인 구매 반응을 보니 너무 비싸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잘 찢어지지 않는 고급 종이를 사용하고, 케이스·은박·동전 등의 요소를 넣다 보니 200쪽짜리 에세이보다 제작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어갔다. 아마 두 배는 될 것이다. 싸게 매긴 가격이고 팔아도 남는 게 거의 없다.
출판이라는 건 늘 문화 운동적 요소가 있다. 만약 그런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출판은 기초 문화로서 자격을 상실할 것이다. 페이지 원 기획에도 그런 무브먼트의 정신이 묻어 있다. 무거운 것도 가벼울 수 있고, 사실 그 둘은 별로 다를 게 없다고도 살포시 우겨본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책에 대해 갖는 선입견에 놀랄 때가 많다. 두꺼운 건 어려운 게 아니다. 얇다고 무조건 쉬운 것이 아니듯이. 벽돌책 전문 출판사가 그런 마음으로 페이지 원이라는 설레는 첫발을 뗐다. 누군가에게 가닿았으면 한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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