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무분별한 출국금지 '제동'…"증거인멸 우려 없으면 통지해야"
출장때문에 공항 도착해서야
출국금지 알고 비행기 놓쳐
"위자료 등 585만원 지급하라"
과도한 기본권제한 논란 지속
실제조사 안했는데 출국금지
필요따라 연장하며 통지 안해
정부, 출국금지 요건강화 검토

지나치게 남발되고 있는 수사기관의 '출국금지' 관행에 대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해외 도피를 막기 위한 출국금지가 조사도 받지 않은 사건 관계자의 발을 묶는 방식으로 운용될 경우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취지다.
8일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백주선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국가가 585만5000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사건은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2022년 성남FC 후원금 사건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불거졌다. 검찰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성남FC 감사를 지낸 백 변호사를 사건 관련자로 보고 출국금지 조치를 한 뒤 이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는 '통지유예' 결정도 함께 내렸다.
출입국관리법상 법무부가 출국금지를 결정하면 원칙적으로 곧바로 서면 통지를 해야 한다. 다만 '범죄 수사에 중대하고 명백한 장애가 생길 우려가 있는 경우'엔 예외적으로 통지하지 않을 수 있다. 백 변호사에 대한 출국금지는 이후 두 차례 연장됐고, 통지유예도 계속 유지됐다.
문제가 된 것은 2022년 12월 백 변호사가 일본에서 열리는 변호사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공항을 찾으면서였다. 백 변호사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서야 자신이 출국금지 상태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곧바로 출국금지 해제를 요청해 당일 해제가 이뤄졌지만, 항공편은 이미 떠난 뒤였다. 백 변호사는 출국금지와 통지유예 결정이 모두 위법하다며 국가 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법원 판단은 "출국금지는 적법하지만 통지유예는 위법하다"는 것이었다. 1·2심은 당시 검찰이 성남FC 후원금 사건을 수사 중이었고 백 변호사를 향후 조사할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출국금지와 그 연장 조치는 허용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출국금지 사실을 알리지 않은 통지유예에 대해선 판단이 달랐다. 1·2심은 "성남FC 사건은 이미 언론을 통해 수사 진행 사실이 알려진 상황이었고, 백 변호사가 출국금지 사실을 통보받더라도 증거를 인멸하거나 공모할 고도의 개연성이 없었다"고 봤다.
백 변호사가 출국금지 결정 전후 피의자나 참고인으로 조사받은 적이 없었다는 점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2심은 "변호사 직업 특성상 출국금지 통지유예로 직업적 신뢰와 사회적 평판이 훼손될 수 있다"며 항공권 취소 수수료 85만5000원과 위자료 500만원 등 총 585만5000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을 그대로 확정했다.
대법원은 '범죄 수사에 중대하고 명백한 장애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통지를 미루려면 "피의자나 참고인이 통지 자체로 도주하거나 증거를 없앨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두고 "출국금지와 연장 결정 '통지유예'에 대한 위법성 판단 기준을 처음 제시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출국금지는 운용 방식에 따라 과도한 기본권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지속돼 왔다. 현행법상 출국금지 기간은 한 차례 최장 1개월이지만 수사 필요에 따라 매달 연장할 수 있고, 연장 횟수엔 별도의 제한이 없다. 여기에 통지유예까지 더해지면 당사자는 출국금지 사실을 모른 채 공항에서야 출국이 막힌 사실을 알게 될 수 있다. 2024년 검찰의 출국금지 조치 중 51.2%, 경찰은 32.7%가 제때 통지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조사보다 출국금지가 먼저 이뤄지는 관행을 둘러싼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2차 종합특검은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이 수원지검의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 수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수사한다며 지난달 13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출국금지했다. 그러나 이날까지 한 전 대표에 대한 소환 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순직해병 특검도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주호주 대사 임명 과정에 한 전 대표가 관여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지난해 3개월간 그를 출국금지했지만, 조사 없이 무혐의 처분했다.
국가기관들도 지속적으로 출국금지 남발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2020년 출국금지가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라며 수사 목적의 출국금지 대상을 '범죄 수사가 개시된 피의자'로 한정하고 통지유예 요건을 강화하라고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7~2019년 수사 목적의 출국금지 요청 승인율이 98% 이상이고, 2019년 1월~2020년 3월 수사 목적 통지 제외 요청 6036건이 모두 승인됐다"며 "법무부 심사가 출국금지 남용을 통제할 정도로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영국 등 주요국도 형사절차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의 출국을 제한하는 제도가 있지만, 대체로 법원의 석방 조건이나 보석 조건으로 출국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법무부는 형사사건 관련자에 대한 출국금지 요건 강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성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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