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부품 한우물 판 제조도시 교토 … 'AI 하드웨어' 심장부 됐다

이승훈 특파원(thoth@mk.co.kr) 2026. 5. 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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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적 신기록 쓰는 교토 기업들
'소프트웨어도시' 도쿄와 달리
소재·정밀기술 제조업 중심지
호리바 등 글로벌 기업 길러내
기업·대학·연구소 등 밀집해
정보 교환·협업 속도 빠르고
단기성과보다 기술축적 중시
'혼모노' 제조 철학도 경쟁력
일본 교토의 교세라 본사 내에 교세라 주요 제품을 전시한 쇼룸(위), 일본 교토 우지에 있는 닌텐도 뮤지엄 전경(아래). 교토 이승훈 특파원

일본을 대표하는 부품·장비 회사인 무라타제작소, 교세라, 니덱은 교토의 '고산케' 기업으로 불린다.

고산케는 에도 시대(1603~1867) 도쿠가와 쇼군을 보필하던 가장 핵심적인 세 가문 오와리·기슈·미토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필적할 정도로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회사 세 곳이 이들 고산케 기업이다.

맏형으로 꼽히는 무라타제작소는 최근 2026회계연도(2026년 4월~2027년 3월) 연결순이익이 전년 대비 25% 증가한 2930억엔(약 2조7500억원)이 될 전망이라고 발표했다. 인공지능(AI) 서버에 필수인 적층세라믹콘텐서(MLCC) 판매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MLCC는 전자제품의 회로에서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AI 서버 1대당 1만5000~2만5000개가 필요하다. 서버뿐 아니라 반도체가 들어가는 모든 전자기기에 필수로 쓰여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기도 한다. 무라타제작소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0%에 달한다. 나카지마 노리코 무라타제작소 사장은 "AI 서버를 중심으로 한 데이터센터의 성장세가 거세다"며 "소형은 물론이고 대용량 MLCC를 찾는 고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고산케의 다른 축인 교세라도 2026회계연도에 매출은 6% 늘어난 1조9400억엔(약 18조2000억원), 영업이익은 10% 증가한 1300억엔(약 1조220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실적 호조를 이끄는 것은 반도체 관련 세라믹 부품 수요 증가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교세라는 설비 투자를 전기 대비 51%나 늘린 2250억엔(약 2조1000억원)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일본 경제를 떠받치는 도시는 단연 수도인 도쿄다. 주요 대기업 본사가 몰려 있고 금융·서비스·플랫폼 등을 갖춘 전형적 '소프트웨어' 도시다.

도쿄 이전에 1200여 년간 일본의 수도 역할을 했던 교토는 전혀 다르다. 일반인에게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관광 도시이지만, 실상은 소재·부품·정밀기술이 집약된 '하드웨어' 도시다.

교토는 인구 142만명, 면적 828㎢ 규모다. 2194㎢ 크기에 1400만여 명이 살고 있는 도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제조업 비중이 20~25%에 달한다. 이는 도쿄의 2~3배로 산업 밀도는 압도적이다. 이러한 좁은 도시에서 닌텐도, 무라타제작소, 교세라, 오므론 등 글로벌 기업이 잇달아 탄생했다. 최근 인공지능(AI) 시대가 되면서 이들 기업의 경쟁력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AI는 소프트웨어 산업처럼 보이지만 실제 경쟁력은 반도체와 센서, 정밀부품 등 물리적 기술에 의해 좌우된다. 결국 '기술의 교토'가 없이는 AI 시대를 이끌어갈 일본의 힘을 찾기 어렵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교토 기업은 왜 이렇게 성장했고, 이들이 가진 경쟁력은 무엇일까. 우선 콤팩트 도시 구조를 꼽을 수 있다. 교토는 중소 도시지만 기업과 대학, 연구소가 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다. 물리적 거리가 짧다보니 정보 교환과 협업 속도가 빠르고 의사결정도 효율적으로 이뤄진다.

특히 일본에서 노벨상의 산실로 불리는 교토대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1949년 일본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를 시작으로 교토대 출신 노벨상 수상자만 10명에 달한다.

두 번째는 '혼모노(本物)' 문화다. 눈앞의 유행이나 단기 성과보다 '진짜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기업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1200년을 지켜온 귀족 문화의 깐깐한 취향이 이곳에 투영됐다는 평가도 있다. 이 때문에 기술 개발도 단기 수익보다 장기 축적에 초점이 맞춰지고, 결과적으로 쉽게 따라잡기 어려운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세 번째는 '불역유행(不易流行)'이다. 이는 바꿀 것은 바꾸되, 지킬 것은 끝까지 지킨다는 의미다. 교토 기업들은 전통 기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신기술을 받아들인다. 이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기업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

네 번째는 기업·대학·금융이 유기적으로 얽힌 에코 시스템이다. 특히 1941년 창립한 교토은행을 필두로 한 교토 금융기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교토은행은 교토에 본사를 둔 상장기업 65곳의 지분을 모두 갖고 있다. 이 가운데 36곳은 10위 안에 드는 대주주다. 교토은행은 기업의 성장 과정에서 대출보다 투자를 우선시했다. 지금의 벤처캐피털 역할을 80~90년 전부터 해온 것이다.

마지막은 업종 간 교류와 글로벌 시야다. 특히 일본에 머물지 않고 초기부터 해외 시장을 개척하려 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를 교토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부품과 장비를 팔기 위해서는 도쿄의 대기업에 가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데, 교토인의 자존심이 차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해외에서 먼저 성공을 거둬, 도쿄 대기업이 찾아와 부품 공급을 요청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교토 이승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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