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경쟁력, ‘가격→공급망’...중동리스크에 에너지안보 ‘흔들’

권준범 기자 2026. 5. 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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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연구회 정책세미나'서 전문가들 한목소리로 강조
생산 중심 에너지안보 한계·전력시장 제도개선 필요성 지적

[수소신문] 미국과 이란 간 충돌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국내 에너지업계와 학계에서 "에너지 안보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단순히 원유를 얼마나 확보했는지가 아니라, 공급망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느냐가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7일 그랜드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전력산업연구회 정책세미나에서는 중동발 지정학 위기와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가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미칠 파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국제 유가 상승 자체보다 물류·보험·정제·전력망까지 연결된 복합 시스템 리스크가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이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

김덕일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연구위원은 "이번 사태는 단순한 지역분쟁이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이벤트"라며 "호르무즈 해협과 바브엘만데브 해협이 동시에 불안정해질 경우 유가뿐 아니라 물류·보험·공급망 전체가 충격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 위원은 미국과 이란의 충돌 양상에 대해 "전면 화력전보다는 해상 통제와 금융제재, 드론·정보전 중심의 '버티기 전쟁' 성격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기존의 '생산 중심 에너지 안보' 개념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정용헌 전 아주대 교수는 "이제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보다 공급망 네트워크가 얼마나 유지되느냐가 중요해졌다"며 "정제시설, 운송망, 금융망 가운데 하나만 끊겨도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LNG 핵심 설비인 극초저온 열교환기(MCHE)처럼 복구에 수년이 걸리는 장비가 많아 공급망 충격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조성봉 전력산업연구회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발표자들은 우리나라의 높은 중동 의존도를 구조적 취약 요인으로 꼽았다. 현재 국내 원유 도입의 약 70%가 중동산에 집중돼 있는 만큼 공급선 다변화와 전략 비축 체계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태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정책연구실장은 "에너지 정책이 수요 감축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다"며 "비축·공급망 다변화·자원개발이라는 공급 안정 3대 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축유도 단순 저장이 아니라 국내 정유설비와 맞는 사양인지 점검해야 하며, 스왑과 대여 등 동태적 운용 전략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LNG의 전략적 역할도 재조명됐다. 김창규 민간LNG산업협회 부회장은 "에너지 안보의 기준이 '얼마나 확보했는가'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로 바뀌고 있다"며 "LNG 터미널 역시 단순 저장시설이 아니라 물류·트레이딩·수급 조정 기능을 수행하는 거점 인프라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세미나에서는 탄소중립 정책과 에너지 안보 사이의 균형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는 에너지 안보를 확보할 수 없다"며 "변동성을 보완할 백업전원과 송전망, 저장장치 확충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원전 확대와 석탄발전의 전략적 유지 필요성도 언급하며 "에너지 정책은 더 이상 환경정책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주요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어 실제 전력 현장에서는 공급망 병목 문제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손용호 강릉에코파워 부사장은 "동해안 석탄발전소들이 송전망 제약 때문에 이용률 30% 이하에 머물고 있다"며 "전력수급 불안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송전망 확충 지연은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손 부사장은 동해안 HVDC 송전망 준공 지연 가능성과 예비부품 비용 문제 등을 거론하며 전력시장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공통적으로 향후 에너지 경쟁은 '저렴한 에너지 확보'가 아니라 '비용이 들더라도 안정적인 공급망을 유지할 수 있는 역량'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미국·중국·중동 국가들이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과 전략 자산 확보에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 전략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