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가 여행객에게 남겨야 할 것[꼬다리]

최근 찾은 싱가포르는 관광지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10분만 돌아다녀도 셔츠가 땀으로 젖을 만큼 더웠다. 공기에는 습기가 무겁게 달라붙었다. 그렇다고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처럼 압도적인 자연풍광이 있는 국가도 아니었다. 발리나 사이판처럼 투명한 바닷속을 즐기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잦은 비가 바닷속 시야를 흐렸다.
그런데도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은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속았다’는 표정을 예상했지만, 여행객들의 표정은 오히려 만족과 여유가 읽혔다. 이런 만족감은 숫자로도 드러난다. 싱가포르 관광청에 따르면, 올해 싱가포르 방문객은 약 1800만명, 관광 수입은 300억싱가포르달러(약 35조원)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싱가포르 면적은 한국의 140분의 1 수준이지만, 관광객과 수입은 비슷하거나 더 많다.
싱가포르의 한 카페에 앉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우리가 즐기는 것은 풍경보다 일종의 감각이 아닐까.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해방의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싱가포르는 해방의 감각을 공간과 시간의 정교한 설계로 만들어냈다. 초고층 건물이 즐비한 금융중심지 한가운데 불쑥 놓인 19세기 건축물 ‘라우 파 삿(Lau Pa Sat)’도 그렇다. 이 건물은 빌딩 하나는 족히 들어설 부지에 빨간 팔각지붕을 올린 1층 건물이다. 팔각지붕 아래엔 바쿠테(싱가포르식 갈비탕), 사테(동남아식 꼬치구이) 등 동남아식 음식을 파는 가게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한국이라면 비싼 땅값이 아까워 빌딩이 됐어도 열두번도 더 됐을 부지였다. 싱가포르는 이 공간을 허락함으로써 도시 한가운데에 연회장을 만들었다. 특히 밤이 되면 켜지는 라우 파 삿의 주황색 형광등은 빌딩의 하얀 LED 등과 대비됐다. 주황색 불빛은 빌딩 속 창백한 긴장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여행객과 현지인들은 비싼 음식 가격도, 30~40분의 기다림도 기꺼이 감수했다. 공간의 파격이 만든 해방감이었다.
라우 파 삿이 해방의 공간을 제공했다면, 싱가포르 창이 공항은 시간을 제공했다. 다른 국가들은 체크인과 보안 검색을 함께 진행하며 길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다. 반면 창이 공항은 보안 검색 과정을 체크인과 떼어냈다. 한꺼번에 몰리는 보안 검색은 면세점을 지나 게이트 앞에서 비행편마다 따로 할 수 있게 했다. 보안 검색의 병목을 제거함으로써 대기 시간을 10분 내외로 줄인 것이다.
그만큼의 시간은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 된다. 여행자는 출국 직전까지 세계 최대 인공폭포를 구경하고, 싱가포르 음식을 즐기며, 면세점을 이용한다. 일상으로 향하기 직전까지도 몰아치는 해방의 감각을 여행객에게 선사한다. 시간의 파격이 만든 해방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월 외국인 관광객 3000만명 시대를 향한 비전을 선포했다. 서울 중심의 관광을 넘어 지역 주도형 관광을 추진한다는 취지다. 각 지역은 대통령의 당부대로 ‘매력적인 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방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의 관광산업에는 그 이상이 필요한 시점 아닐까 하는 의문도 함께 든다. 한국은 지금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떤 감각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까.
오동욱 기자 5d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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