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과 틈…군산 ‘마리서사’의 가정식 서가와 팽나무[가장 급진적인 로컬, 동네서점](7)

어떤 장소에 대한 경험은 삶의 방향을 미묘한 방식으로 바꾼다. 우리가 일상의 공간을 떠나 여행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환된 장소가 주는 힘을 얻기 위함이다. 독립서점은 답사, 순례, 여행, 출장까지 어떤 것과 맞붙여 놓아도 기대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각각의 책이 열어주는 세계, 책방지기가 일궈온 사유의 고유성, 지역 안에서 맺어진 생활에 근간한 관계성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에 답사의 본래 목적을 잊게 할 만큼 풍성한 경험의 본산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지역 답사를 위해 기차에 몸을 실을 때면 지역의 독립서점으로 발길을 하게 된다. 낯선 곳과 책, 모두가 삶에 ‘틈’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공통되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자의 서점, 마리서사”
전북 군산의 독립서점 ‘마리서사’에 다녀왔다. ‘마리서사’는 박인환 시인이 광복 이후 서울 종로 낙원동 입구에 열었던 서점의 이름에서 왔다. 해방의 열기 속에 문학, 영화, 미술 관련 잡지와 도서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박인환은 문인으로서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문인과 함께 195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 시운동을 정초했다. 문학열에 들뜬 청년들의 꿈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전쟁, 분단으로 이어진 광폭의 시대를 경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낙원동 마리서사 운영 기간 또한 길지 않았다.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인물이나 예술을 모토로 삼을 때 시간의 간격은 박제화와 권위에 대한 억눌림의 계기가 되거나 창조적인 재창작의 동력이 된다. ‘마리서사’에 방문하기 전에 군산과 서울, 해방기와 21세기 사이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 시인의 책방을 재해석하고자 했을 때 어떤 의미들이 만들어졌을까 질문이 있었다. 이 서점에는 ‘박인환’ 혹은 ‘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헌사가 남아 있을까. 한때 불란서의 자유와 문화를 정신적 해방으로 삼았던 시인의 사유를 변형한 것일까. 레트로적인 것 혹은 노스탤지어적인 것에 근간한 시간 해석을 기대하고 방문한 소비자와의 만남을 견인하는 것은 아닐까. 질문들을 안고 서점으로 향했다.

군산 월명동 일대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 1채를 개조한 ‘마리서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단이 나뉘어 얕은 아래층과 위층의 서가로 분리돼 있었다. 책방의 오른쪽 서가로 향했다. 위스키, 채식, 수납 방식과 공간에 관한 책들이 밖에서 들어오는 빛과 어울려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영화 <소공녀>에서 가사 도우미로 손수 일한 만큼 얻은 돈으로 살아가지만, 하루 노동 후 위스키 바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정성껏 선택한 위스키를 음미하던 주인공 ‘미소’의 삶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또 “감정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용기에 대하여”, “나는 연결되어 있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부제를 단 생활철학 계간지가 꽂혀 있고 근처에 잡지의 역사를 소개한 손글씨 메모가 있었다. 과잉되지 않은 삶과 자기 돌봄의 실천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페미니스트 매니페스토’, ‘세상을 바꾸는 편지의 힘’ 그리고 ‘평화바람’
조금 더 책방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리서사’의 책방지기와 나눈 짧은 대화에서 문학에 대한 애정을 발견했는데, 과연 안쪽 서가에는 한국문학 근간과 세계문학전집 등 문학도서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서점 곳곳에서 기형도와 김종삼의 시, 연령별 즐겨 읽는 세계문학 목록 등 서가 곳곳의 메모를 따라가다 보면 글씨를 쓴 이가 삶에서 멈춰 섰던 지점들, 또 그 걸림돌을 넘어서게 했던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김종삼 시인이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말을 걸기도 한다. 그리고 문학 서가의 곁에는 4·19, 5·18 등 기억해야 할 항쟁과 관련한 도서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군산의 ‘마리서사’는 그렇게 서점의 방문객들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운동시키는 공간이다. 적절히 보존된 공간이 주는 미학적인 새로움과 안온함, 진열된 특별판 문구류, 잘 펼쳐지는 수첩과 서점 굿즈가 동시대 텍스트힙의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동시에 서가의 곳곳에 동시대에 우리가 뚫고 나가야 하는 틈은 어디인가 방향을 지시하는 책이, 선언이, 잡지가 놓여 있다. “충만한 존재가 될 것”, “성 역할은 완전히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이 적힌 엄마를 위한 페미니스트 매니페스토가, 사라 아메드와 오드리 로드의 글귀가 서가 한쪽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인권을 위한 편지쓰기 캠페인을 위해 편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언론 활동을 이유로 구금되고 구타를 당한 ‘사이 조 타익’의 석방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얀마 군부에 보낼 수 있는 종이가 마련돼 있다.

그리고 새만금의 멸종위기종인 검은머리갈매기·저어새의 배지와 스티커, 군산 평화지도, 군산의 평화운동 단체 ‘평화바람’의 잡지가 눈에 띄었다. 안도감을 느꼈다. 이 잡지와 비인간 생물과의 연대를 보여주는 상징들은 식민지 근대의 문화적 보존물들, 말랭이 마을과 단팥빵과 함께 군산에서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향해야 할 곳을 지시해주고 있었다. 선 채로 뒤적인 ‘군산에서 부는 평화바람’에는 군산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하다가 카페를 하고 있는 한 활동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달걀로 바위가 쪼개”지는 기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전히’ 믿는다고 했다. 또 성주, 밀양, 군산의 행정집행의 연결됨을 추적해온 한 사진가는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을 사진으로 기록했지만, 그곳의 노골적인 전시를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2021년부터 갯벌 살리기와 평화를 기원하는 한편 곳곳의 약한 자의 고통을 기억하고 저항의 의지와 역사를 살피는 축제인 ‘팽팽문화제’가 열리는 하제마을 팽나무가 떠올랐다.
서점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는 시간을 초월해 많은 것이 중첩돼 공존한다. 독립서점은 상업적인 존재 방식 위에서도 책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한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이 고스란히 현현되는 공간이다. 허락되는 한에서 책을 매일 주문하고 “어느 가정집 서가처럼 편중되지 않으려” 배치하는 노동 속에 군산 ‘마리서사’라는 하나의 공간이 매일 주조된다. 세계와 역사와 사회 그리고 내 안의 취약한 것들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다. 발길을 돌려 나오는 길에 수평으로 높인 책들에 비친 볕을 바라보았다.
박상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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