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거꾸로 읽는 한국 여성문학 100년](28)

2026. 5. 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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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장편소설 <표류도>
젊은 시절의 박경리 작가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1959년에 발표된 <표류도>는 1956년에 30세의 나이로 <계산>, <흑흑백백>으로 데뷔해 경력이 길지 않은 박경리를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박경리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처녀 공출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했지만 한국전쟁기 서대문형무소에서 허무하게도 남편 김행도를 떠나보냈다. 작품들은 그 후 여성 가장이 돼 거둔 수확이었다. 지역 도서관의 소개 글이 말해주듯이 세상은 이 작품을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이른바 불륜의 사랑”을 그린 대중소설로 부른다. S대 사학과 출신으로 다방 ‘마돈나’를 경영하는 강현회가 불륜의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 소설은 6.25 전쟁의 트라우마에 노출되는 한편으로, 벌거벗은 생존주의가 만연한 전후의 현실에서 여성 지식인의 구원을 향한 길 찾기에 관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금괴 밀수를 저지른 범죄자가 해방 후 우국지사로 둔갑해 부와 권력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이군인 가족의 절망과, 몸을 팔아 가족과 민족을 부양했지만 이제는 동족의 혐오를 받는 양공주 등이 등장하는 삽화들을 통해 전후의 무질서 혹은 전쟁의 상흔을 그리기도 했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압도적인 공허와 무의미가 자꾸만 죽음의 언저리를 서성대게 하는 절망으로부터 어떻게 삶을 구할 수 있을까? 강현회는 아름답고 젊은 여성으로, 누군가는 그를 통해 구원을 기대하고, 누군가는 값비싼 물건에 마음을 뺏기듯이 소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강현회는 비명에 간 남편 찬수에 대한 기억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다방의 월세와 노모와 딸의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여성 가장일 뿐이다. 가난하고 공허한 이 여자는 철로처럼 끝까지 합쳐지지 않을 것이고 끝내 연애는 굴종이 될 것이라고 냉소하면서도, 저널리스트인 이상현에게 애착한다. 이상현은 빈곤과 악다구니가 끓어넘치는 강현희의 세계와 다른 상류사회의 일원이고, 결정적으로 그는 어엿한 가정을 거느린 유부남이지만 “격렬한 교감(交感)에 또다시 얼굴이 타고 팔다리가 나른해지”는 환희의 도피처에 머물고자 한다.

황폐한 시대에 사랑은 구원일 수 있는가? 누군가는 연애소설로 읽지만 이 소설은 생존하기 위해 더 이상 사랑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탈로맨스 서사다. 사랑이 주는 환각과도 같은 황홀에 기대기보다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이야기하는 소설인 것이다. “우린 서로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아요”라는 말로 강현회는 사랑을 시작하자마자 헤어지는 중이다. 그런 강현회를 성과 사랑 그리고 가족에 관한 “제도의 터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정명환) “기만적 자아”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이별은 사랑의 환각으로부터의 탈피, 즉 사랑이 가난, 고독, 불행, 절망의 드라마틱한 해결책일 수 없다는 깨달음의 소산이지 가부장적인 정조론을 신봉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욕망으로부터의 물러섬은 전후 가부장적인 재건 정치의 파고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우선은 살아남겠다는 여성적 결단이기도 하다.

여성혐오라는 시대의 감정 구조 드러내

이 소설이 전후를 대표하는 여성문학사의 정전인 것은, 해방 세대 여성 지식인 주인공을 통해 전후 사회재건의 가부장성과 여성 혐오라는 시대의 감정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법은 사회적 이익이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를 천명한 ‘박인수 사건’(1955)이나 가정 부인의 탈선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를 야기한 정비석의 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1956) 논쟁이 보여주듯이 전후 사회의 재건은 남성이 사회의 주도권을 여성에게서 되찾아오는 젠더 정치의 일환이었다. 식민지기의 ‘신여성’, 해방기의 ‘노라’, 전쟁기의 ‘아프레 걸(Après‑guerre + girl)’로 이어져 온 불온한 여성들의 역사에 반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학력자이면서 다방 마담이 된 이유가 뭐냐는 이상현의 질문에, 강현회는 자신이 학교 교사였으며 “쫓겨난 직접적인 원인은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고학하는 대학생이었던 그는 찬수의 친구이자 강현회의 후원자인 ‘김 선생’(김환규)의 말대로 “씩씩하고 야문 여자”로, 정조보다 애정의 윤리를 신성하게 여기는 한편으로 생활비를 절약해야 했기에 찬수와의 동거를 선택했다. 그러나 아메리카니즘으로 오염된 사회를 정화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풍기문란의 정치가 이루어지자 그는 난잡한 여자로, 그의 딸 훈아는 사생아로 전락해 사회로부터 추방당한다. 강현회가 도달한 세상의 끝이 다방 마돈나였던 것이다.

이 소설은 감옥과 법정 장면을 통해 남성중심사회가 공고히 구축되며 가부장제가 제도화되는 과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문제적이다. 강현회는 미국인에게 “여자는 돈과 폭력이면 정복되는 동물”이고, “이런 곳(다방-필자)에 있는 여자는 레이디가 아니”라며 최강사가 자신을 모욕하자 우발적으로 청동 꽃병을 던져 그를 살해하고 법정 구속된다. 박경리는 감옥 속 다양한 여성 범죄자들-불륜으로 태어난 자기 아이를 살해한 여자, 늙은 양공주, 겁탈당하지 않기 위해 가해자를 살해한 여자 등-을 통해 법이 여성들의 인권을 외면하고 여성에게 풍기문란의 죄를 전가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강현회가 살인에도 불구하고 2년형이라는 비교적 경미한 처벌을 받은 것은, 자신을 외국인에게 매도하려는 최강사에 맞서 자신의 정조=생명을 지키려고 했고, “비록 불미스러운 이성 관계가 있었지만 진실한 생활자”라는 변호를 법정이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법정은 강현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으로, 여성의 정조를 여성의 생명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승격시키고, 사실상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부정한 것이다.

자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여성 서사의 관습적 특징이기도 한데, 마돈나의 ‘레지’인 광희는 강현회의 짝패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사막에 핀 사보텐”으로 비유되는 광희는 순수한 관능을 상징한다. 전쟁으로 실향민이 된 그는 자신처럼 전쟁의 폭력에 노출된 시인 민기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지만 그에게 버림받고 그의 아이를 낙태 수술하는 수치에 노출된다. 이후 광희는 더 이상 순정한 처녀가 아니라 남자에게 교태를 부리고 “동물적인 도전”을 삼가지 않음으로써 남성의 욕망을 가지고 노는 섹슈얼리티의 전제군주이고 싶어 창부가 된다. 손님과 화대를 시비하다가 구속되어 강현회와 조우한 광희는 지독한 성병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고 만다. 박경리는 광희의 난잡한 섹스를 자존을 지키기 위한 서글프고 처절한 반항으로 해석해 내면서도 광희의 죽음을 통해 자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삶을 지키기 위해 자존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생명의 본능에 의지해 암흑과도 같은 시대를 통과해가자고 제안한다. 강현회가 출옥 후 이상현의 구애를 물리치고 현실주의자로 강현회의 이상과 거리가 먼 김선생에게 프로포즈하는 것은, 그간 후원자가 되어 준 김선생이 자신이 의지해 온 대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하장편소설 <토지>는 박경리(1926~2008)의 자타공인 대표작이다. 1969년 6월부터 연재가 되기 시작해 1994년에 완성되어 총 집필 기간만 장장 25년이 걸린 이 대작은 한국문학사의 보고이자 박경리 문학을 대표하는 필생의 역작이다. 박경리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어 <토지> 이전의 작품들은 습작에 불과하다고 한 바도 있다. 이러한 고백은 장편소설 <표류도>(1959), <성녀와 마녀>(1960), <김약국의 딸들>(1962) 등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한 대중적 인기작들을 일거에 후려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이 고백은 대체로 육친적인 것에 대한 감정이 대체로 순편하기 어려운 바처럼, 앞선 작품들이 작가 자신과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뒤엉켜 있는 삶-소설임을 암시한다. 기실 이 작품들은 한 사람의 탁월한 영웅서사나, 민족의 이야기로 수렴되지 않는 생명의 인드라망에 대한 상상력인 <토지>가 탄생한 연원을 가리켜 보여준다. 특히, <표류도>는 박경리 문학 사상을 집약하는 키워드인 생명 사상의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여성적 맥락을 찾기 위해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2026년은 박경리가 탄생해 여성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백년이 되는 해이다.

김은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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