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무슨 일 있었나/ 박대통령 암살-12·12 군권 확보-5.17 비상계엄 저항세력 축출-5.18 광주시민 저항

이건상 기자 2026. 5. 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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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26
서울의 봄과 민주화 요구의 확산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장기 독재에 균열이 발생했다. 정치권과 대학생,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은 유신헌법 철폐, 계엄 해제, 대통령직선제 개헌, 정치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축으로 한 군부세력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빌미로 직속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 체포(12·12사태) 하면서 군권을 장악했다. 이들 군부세력은 육사 11기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을 주축으로 한 대구경북지역 출신의 하나회라는 군대 내 비밀모임 인물들이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박정희 뒤를 이어 권력 장악에 대한 야심을 점차 노골화했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에 집결한 대학생 시위대.

1980.5.15
대학생 10만명 서울역 회군
전국 각지에서 모인 약 10만 명 이상의 대학생들은 서울역에 집결,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위 직전, 학생 지도부는 돌연 해산을 결정했다.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회군 결정의 배경에는 군의 개입 가능성과 대규모 유혈 충돌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비무장 상태였으며, 공수부대 등 군 병력이 투입될 경우 대규모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장기적인 운동 지속을 위해 일시적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려도 작용했다. 회군 이후 민주화 운동의 동력은 약화됐다.

1980.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권력 장악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실시했다. 이 조치에는 제주도를 포함하는 계엄지역의 확대 뿐 아니라, 정치활동 금지, 국회 기능 정지, 정당활동 중단, 대학 휴교령이 포함됐다. 동시에 김대중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과 학생·재야 인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이 실시, 대거 체포됐다. 언론 또한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정보 전달 기능이 제한되었다.

신군부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을 모조리 제거한 셈이다. 형식적으로는 대통령 권한에 따른 합법적 조치였지만, 실제로는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직접 장악한 쿠데타적 성격을 지녔다. 이 조치로 인해 신군부는 12·12를 통한 군권 장악, 5.17 조치로 사회 저항 세력의 말살을 통한 정권 장악에 한 발 더 나아가게 됐다.
 
80년 5월18~19일 금남로 일대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 5.18 기념재단 제공

1980.5.18
신군부에 유일 저항 시민 자치

비상계엄 확대에 광주지역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5월 18일 오전 9시 전후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정문 시위를 계기로 시작된 저항은 계엄군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빠르게 시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초기에는 학생 중심의 시위였으나, 폭력 진압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운동은 전면적인 시민 항쟁으로 발전했다.

7공수, 11공수와 3공수, 20사단이 연차 투입, 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했다. 특히 5월 20일 광주역과 21일 도청 앞 계엄군의 발포 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광주시민들은 인근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 등을 통해 무기를 획득, 계엄군에 맞섰다. 21일~26일 광주시 전역을 봉쇄한 진압군은 외지로 나가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를 자행했다.

시민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 고립 속에서도 주먹밥을 나누고 피가 부족하자 헌혈운동을 벌이면서 시민자치를 실시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재진입하면서 항쟁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5·18로 166명 사망, 2천504명 상해, 행방불명 73명의 인적 피해가 발생했다.
 
광주 학살 후 등장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1980.5.31
국보위 설치 권력의 제도화

광주 시민을 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를 설치했다. 국보위는 입법·행정·사법 전반을 통제하는 초법적 기구로 전두환이 대표를 맡았다. 이는 사실상 국가 최고 권력 기관으로, 군부가 공식 국가기구 위에 군림하는 구조를 완성,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국보위는 정치권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고, 정당 활동을 중단시켰다.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삼청교육대가 운영돼 강압적 통제가 이루어졌다. 삼청교육대는 영장 없는 체포, 군사훈련, 강제노동이 자행돼 인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1개 도 지역에는 1개의 언론사만 존재하는 언론 통폐합도 이뤄져 정보 통제가 강화됐다. 이러한 조치들은 공포와 통제를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용했다.
 
전두환 세력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인 삼청교육대

1980.8.27
전두환 정권 출범 7.6년 대통령직

최규하 대통령은 8월 16일 신군부의 압박에 못이겨 강압적으로 하야했다. 8월27일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다시 소집되어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대의원 737명의 추천을 받아 유일하게 입후보, 99.4%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전두환은 8월27일 취임 후 전임 대통령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26일까지 직을 수행해야 했으나,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한 개헌을 통해 1981년 2월25일 대통령(12대)에 당선, 1988년 2월24일까지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7년6개월 통치는 군홧발이 난무한 전형적인 군부독재였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