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빈티지 100만병이 잠들어 있다”… 살아있는 부르고뉴 와인 박물관, 흐무와스네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부르고뉴 유명 생산자 올드 빈티지 100만병 보관
자연 순응 양조·완벽한 포도알만 골라내 만들어
‘와인 애드보케이트’ 부르고뉴 수석 비평가 출신 로바니
“젊은 세대 부르고뉴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 사명”


흐무와스네는 단순한 네고시앙이 아닙니다. 부르고뉴의 기억을 보관한 하우스로, 전 세계 컬렉터들이 가장 신뢰하는 올드 빈티지 공급처 중 하나로 꼽힙니다. 희귀 올드 빈티지의 성지 흐무와스네의 전설은 1877년 피에르 알프레드 흐무와스네(Pierre-Alfred Remoissenet)가 본 시내 중심에 와이너리를 설립하면서 시작됩니다. 와이너리는 14세기에 지은 건물이라 지금도 셀러에 들어가면 오래된 석조 벽과 아치형 구조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의 나이테를 만납니다.
초창기 흐무와스네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직접 포도를 재배하기보다는 부르고뉴 전역에서 뛰어난 와인을 사들여 장기 숙성한 뒤 최상의 상태에서 판매하는 네고시앙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특히 희귀 올드 빈티지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 부르고뉴 애호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흐무와스네를 이끌고 있는 로바니 회장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흐무와스네 와인은 나라셀라에서 수입합니다. 전직 와인 비평가였던 그에게는 남다른 무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와이너리 셀러를 마음껏 드나들며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수많은 셀러를 돌아다니다 마침내 하나의 진리에 도달합니다. “최고의 와인 생산자들은 결국 모두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더군요. 왜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흐무와스네에 합류한 이후 세계 최고의 셀러에서 배운 교훈을 그대로 이곳에 적용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로바니가 와인 양조 철학을 설명하며 꺼내든 단어는 뜻밖에도 ‘마리나라(Marinara)’입니다. 이탈리아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드는 바로 그 토마토 소스 말이죠. “이탈리아 할머니에게 마리나라 소스 만드는 법을 물어보면 이렇게 답합니다. 우선 산 마르자노(San Marzano)처럼 최고의 산지에서 토마토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흠집 있는 것, 살짝 상한 것, 완벽하지 않은 것은 모조리 골라냅니다. 줄기는 떼어내고, 마늘도 바질도 아무것도 넣지 않습니다. 오직 토마토만, 토마토 스스로 말하게 두는 겁니다. 흐무와스네 양조 철학도 이와 같습니다. 소팅 테이블 2개에 10명씩, 총 40명을 배치해 눈을 부릅뜨고 최상의 포도만 골라냅니다.”



흐무와스네가 부르고뉴의 다른 도멘과 차별화되는 대목 중 하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블렌딩)’입니다. 부르고뉴는 전통적으로 각 포도밭에서 나온 와인을 따로 만드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지만 흐무와스네는 빌라쥐 등급 와인에서만큼은 다양한 파셀(Parcelle·소구획 포도밭)을 자유롭게 블렌딩해 시그니처 스타일을 만들어냅니다. “북부 론 에르미타쥐(Hermitage)의 폴 자블레 에네(Paul Jaboulet Aîné)가 여러 파셀을 블렌딩해 최고의 떼루아를 표현하듯, 보르도의 샤토 라투르(Château Latour)나 샤토 무통 로칠드(Château Mouton Rothschild)가 각 파셀을 엄선해 자신들의 시그니처를 구축하듯, 우리도 부르고뉴 빌라쥐 와인에서만큼은 아상블라주를 마음껏 즐깁니다. 고지대 파셀은 신선한 산도를, 경사 아래 점토질 파셀은 풍부한 바디와 관능적인 질감을 줍니다. 각 파셀이 어택, 미드팔렛, 피니시를 나눠 담당하는 셈이죠. 조각들의 합이 각 조각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그랑 크뤼 뮈지니로 흐무와스네를 평가하지 마세요. 그 땅은 워낙 위대해서 누가 만들어도 훌륭한 와인이 나옵니다. 흐무와스네를 평가하려면 부르고뉴 빌라쥐 와인을 마셔 보세요.”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마시며 살아온 평론가가 정작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인으로는 가장 낮은 등급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말합니다. 그 역설 속에 흐무와스네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흐무와스네의 얼굴이자 입문 화이트입니다. 부르고뉴 각지의 파셀에서 온 샤르도네(Chardonnay)를 아상블라주해서 만드는 이 와인은 역설적으로 만들기 가장 까다로운 와인 중 하나입니다. 좋은 조각들이 충분히 모여야 하나의 훌륭한 퍼즐이 완성되기 때문이죠. 2021 빈티지는 생산량이 극히 적었지만, 로바니는 “적게 만들었지만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고지대 파셀의 생기 있는 산도와 경사 아래 파셀의 풍성한 질감이 어우러져 단일 포도밭 와인에서는 얻기 어려운 복합미를 선사합니다. 잘 익은 시트러스와 흰 꽃의 우아한 아로마, 크리미한 텍스처와 길고 깨끗한 피니시가 인상적입니다.

사비니 레 본은 원래 레드 와인으로 더 유명한 빌라쥐입니다. 화이트는 그야말로 희귀 아이템이죠. 흐무와스네가 이 와인을 만들게 된 건 한 고령 농부와의 인연 덕분입니다. 이미 사비니 레 본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던 흐무와스네에게 그 농부가 찾아와 자신의 고지대 밭 과실을 사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직접 가보니 화이트 와인을 위한 고지대 파셀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리였습니다. 흐무와스네가 직접 농사를 짓고 수확까지 담당하지만, 땅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도멘(Domaine) 명칭을 붙일 수 없어 네고시앙 와인으로 출시합니다. 황금빛 잔에서 잘 익은 사과와 헤이즐넛, 은은한 버터향이 피어오르고, 둥글게 정돈된 산도와 풍부한 텍스처가 길고 우아한 여운으로 이어집니다.

로바니가 스스로 “가장 만들기 어려운 와인”이라 부르는 엔트리급 피노 누아(Pinot Noir)입니다. 자가 포도와 구매 포도를 섞어 만드는데, 모든 배럴을 따로 발효·숙성한 뒤 아상블라주를 진행합니다. 이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배럴은 절반이라도 벌크 시장에 과감히 팔아넘깁니다. 돈은 거의 못 벌지만, 이 와인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슈퍼 메가 부자들은 그랑 크뤼만 찾습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젊은이들이 이 와인을 마시며 부르고뉴와 사랑에 빠지는 겁니다. 부르고뉴 땅값이 워낙 비싸 엔트리 와인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흐무와스네는 가격을 최대한 낮게 유지하려 애씁니다.” 코에 갖다 대는 순간, 세상에 딱 한 곳 부르고뉴에서만 맡을 수 있는 야생 딸기와 촉촉한 흙냄새가 올라옵니다. 실키한 탄닌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유혹적인 텍스처가 오래도록 남습니다. 부르고뉴 레드의 정석 같은 아로마, 부르고뉴 입문자라면 이 한 잔으로 첫사랑에 빠지기 딱 좋습니다.

순수한 석회암(limestone) 위에 심은 고지대 피노 누아입니다. 경사가 너무 가팔라 트랙터도, 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특수 제작된 소형 탱크 모양의 기계를 사람이 직접 끌고 한 줄 한 줄 올라가야 하는 극단적인 포도밭이죠. 점토가 전혀 없는 순수 석회암 토양 덕분에 산도가 더욱 생동감 있게 살아 있습니다. 로바니는 “와이너리 이름을 흐무와스네 대신 세덕시옹(Séduction·유혹)으로 바꾸고 싶다”고 할 만큼 매혹적인 와인입니다. 레드 베리와 제비꽃의 섬세한 아로마, 높은 산도가 와인 전체를 팽팽하게 잡아주면서도 잘 익은 과실의 풍성함이 공존합니다. 로바니는 한국에서 먹은 돼지 삼겹살·갈빗살과 완벽한 페어링을 보였다며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고지대 피노 누아의 높은 산도가 지방을 완벽하게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달콤한 양념 갈비는 사양이랍니다.

흐무와스네는 쥬브레 샹베르탱 마을 전역에 걸쳐 다양한 파셀을 조금씩 소유하고 있습니다. 고지대 파셀, 저지대 파셀, 다양한 토양과 경사면에서 자란 포도들을 섞어 만드는 이 와인은 어느 파셀은 미드팔렛을 책임지고 어느 파셀은 긴 여운을 더하며 각자의 역할을 나눠 맡습니다. 파셀마다 포도 숙성 시기가 달라 수확도 세 차례에 나눠 진행합니다. 각 수확 시기에 맞춰 발효조도 따로 운영합니다. 비용이 훨씬 더 들고 번거롭지만, 각 파셀이 최상의 상태일 때 수확해야 최고의 와인이 나온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짙은 루비색 잔에서 잘 익은 검붉은 과일과 삼나무, 대지의 향이 깊고 풍성하게 올라옵니다. 촘촘하면서도 실키한 탄닌이 단단히 받쳐주고,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여운이 한참을 머뭅니다. 빌라쥐 등급이지만 로바니는 “부르고뉴 최고의 빈티지 중 하나로 꼽히는 2020년의 힘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2070년에 드셔도 좋습니다”라고 단언합니다.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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