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더 이상 패션 영화가 아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04번째 레터는 7일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입니다. 어린이날 연휴에 ‘슈퍼 마리오 갤럭시’에 1위를 내줬다가 다시 1위로 올라섰네요. 20년 만에 돌아온 미란다, 꼭 한 번 만나보세요. 저희 지면 리뷰는 이미 나갔습니다만, 아직 안 보신 분들, 혹은 보셨지만 저건 뭐지 하신 분들을 위해 분량상 지면에 담지 못한 부분까지 레터로 보내드려요. 제가 이전 레터에서 야구 모른다, 르세라핌 모른다며 모르는 걸 열심히 말씀드렸는데, 패션은 좀 알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흠흠. 알고 봐야 더 잘 보이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의 세계로 가보실까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가 개봉하고 일주일 넘게 지났으니 주변에서 이렇다 저렇다 의견이 많으실 것 같아요. 1편보다 별로였다는 분이 계신다면, 아마도 패션이 별로였다거나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카리스마가 별로였다고 하신게 아닐지. 제 눈에도 패션은 1편에 못 미쳤습니다. 공을 덜 들인 건 아닌거 같은데. 밀라노 패션쇼 장면만 해도 이탈리아 브랜드 전부 나섰거든요. 프라다, 돌체앤가바나, 펜디, 모스키노, 미쏘니 총출동했으니까요. 앤디(앤 해서웨이) 옷은 40벌이 넘는다고 하고. 그런데도 옷 구경 재미는 1편보다 덜하죠. 특히 “그 옷은 천둥 번개가 치는 옷”이라며 엄청나게 파격적인 디자인을 보여줄 것처럼 운을 띄웠던 앤디의 드레스는 주방에서 야채 다듬을 때 입을 법한 옷이라서 매우 실망했습니다. 이 때 확실하게 놀라운 디자인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쯧쯧.
하지만 저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가 1편의 성공 공식을 복제하지 않은, 뚜렷한 목소리와 색깔을 가진 진일보한 속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는 더 이상 패션 영화가 아닙니다. 패션 업계가 등장하는 사회 풍자 영화죠. 뭐든지 뒤엎고 바꾸고 고치고 떼내고 합하고 때려부수는 세상, AI가 당장이라도 인간의 전부를 대체할 것처럼 떠드는 세상에서 지킬 것을 지켜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이젤이 20년 만에 만난 앤디에게 한 말, “이젠 아무도 종이 잡지를 안 사. 디지털, 다운로드, 스트리밍 시대지. 우린 실체가 없는거야”라는 대사는 종이신문 기자인 제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히더군요. 비단 종이 매체와 디지털 매체의 차이뿐일까요. 급격한 시대 변화는 우리 모두가 통과하고 있는 현실이죠. 그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입니다.

주인공 미란다가 1편과 무척 다르다는 점도 속편 분위기를 좌우한 부분입니다. 1편은 미란다의 모델이 된 ‘보그’ 안나 윈투어의 개성이 중요했죠. 고압적이고 냉랭하지만 업계에선 최고인 존재. 그런데 20년이 지난 이 사회에서 미란다는 예전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비서 책상에 코트를 마구 던진다? 회의 중 직원의 말을 비꼰다? 바로 인사과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 들어갈테니까요. 속편에서 미란다는 허둥대며 본인 손으로 사무실에 코트를 겁니다. 회의할 때는 비서가 옆에 딱 붙어서 미란다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헛기침으로 제지하고요. 그래서 1편의 유명한 대사 “꽃을? 봄호에? 혁신적이군(Florals? For spring? Groundbreaking.)”처럼 귀에 쏙쏙 꽂히는 발언을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변한 미란다의 묘사는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기도 했겠고요. 변화 이후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중요할텐데, 여전히 그녀는 세상의 중심과 사람을 꿰뚫어보더군요. 영화 후반부에 앤디와 차를 타고 가다 던지는 한마디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앤디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묘파) 그 말은 영화를 보시고 직접 들어보시길. 독재와 군림만 해서는 우러나올 수 없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이 쨍합니다.

앤디와 미란다가 자동차 타고 가는 장면을 말씀드렸는데, 1편 후반부에도 나오죠. 2편은 1편에서 갖다붙이면서 전혀 다르게 변주한 장면이 꽤 많아요. 그래서 1편을 많이 기억하실수록 더 재미있습니다. 2편 도입부 앤디가 센트럴파크 지나갈 때 벨트 파는 상인이 잠시 나오는데, 푸른 색벨트 두 개를 누군가 고르고 있죠. 1편을 안 보셨어도 아실 법한, 저 유명한 ‘푸른 스웨터’ 장면, 앤디가 무심결에 피식 웃었다가 미란다의 레이저빔을 맞았던 장면에서 나왔던 그 벨트들입니다. 엔딩신에 앤디가 입은 푸른 조끼는 푸른 스웨터 장면에서 입었던 그 스웨터 변형이고요. 변형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 싶은 목소리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대중 영화로서 포인트를 잘 잡은 걸로 보였어요. 미란다의 끝 대사는 1편과 동일하면서 맥락과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변주된 것도 반가웠어요.
결말을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후반부 특정 장면에서 웃으시려면, 브랜드 코치(Coach)의 이미지를 아셔야 합니다. 백화점 명품 매장 브랜드와 거리가 좀 있다는 점, 염두에 두시고 보세요. 전 코치가 언급되는 그 장면에서 푸하하 했습니다. 나이젤의 촌철살인도 큰 웃음을 줍니다. 패션 트렌드 중에 ‘조용한 럭셔리’가 있는데 그걸 돌려서 “조용한 럭셔리라더니 너무 조용해서 보청기가 필요할 지경”이라고 하고, 요즘 넘쳐나는 IT 갑부들의 아웃도어 옷차림을 비꼬아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합성섬유라 성냥 대면 불타겠어”하는 등등 속편의 명언 담당입니다. 나이젤 캐릭터를 2편에서 잘 풀어낸 점도 전체 주조연의 관계가 매끄럽게 이어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 맛보기 시사회를 보고, 20년 만에 만난 주요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엔딩에서 매듭을 잘 짓더군요. 어쩐지 좀 어색하다 했는데 그래서 그랬구나, 하실 거에요. 영화를 보시면 전체적으로 감독(데이빗 프랭클)과 시나리오 작가(에일린 브로쉬 맥케나)가 배경과 설정, 캐릭터와 주제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걸 아실 수 있어요. 모두 1편 만들었던 분들이고 호흡이 잘 맞아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다같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성당에서 저녁을 먹는 장면이 기억에 남으실 거에요. 실제 장소는 아니고 세트를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진짜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있는데, 촬영장 조명이 쏘아대는 강한 빛을 벽화가 감당해낼 수 없을테니까요. 이 장면에서 AI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속물 부자(제니퍼 애니스톤의 전 남편 저스틴 서로)와 인간이 빚어내는 예술의 힘을 믿는 미란다가 나누는 대화는, 듣고 보면 전형적인 내용인데도 흘려들어지지가 않더군요. 속물 부자의 말처럼, 잡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모델과 디자이너도 AI가 대신하고, 심지어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도 AI가 척척 그려내는 그런 세상이 머지않아 눈앞에 도래할까요. 미란다가 지키려 애쓰는 예술도 별게 아닌게 될 그런 날이 곧 닥칠까요.
정답이 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살아있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측불가능한 가치를 AI가 쉽게 대체할 수 없다는 게 아닐지요. 그리고 그 힘을 보여준 게 미란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무슨 말씀이냐면, 미란다가 영화 뒷부분에 이런 말을 해요. “아, 나는 일하는 게 좋아(Boy, I love working)”. 이 한 줄이 얼마나 와닿던지. 이 대사를 말할 때 메릴 스트립은 아마도 진심이지 않았을까요. 미란다에게 일이 존재 증명이면서 동시에 자기 발견이었듯 배우 메릴 스트립에게도 그랬을테니까요. 그리고 아마도 이 레터를 읽는 독자님 중 많은 분들에게도요. AI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평균과 다수의 확률로 돌아가는 매커니즘이잖아요. 알고리즘만 따져서는 “아, 나는 일하는 게 좋아”라는 무분별한 변칙을 쉽사리 대체할 수 없지 않을지. (결말 내용이라 자세하기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이 대사가 발화된 그 상황에서 특히.)
AI는 아마 짐작도 할 수 없을 걸요, 그런 마음을. 할 수 있으면 벌써 이 세상은 규격화 평균화 평준화됐겠지요. 알고리즘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의 나침반, 그 나침반을 따라, AI로는 대체불가능한 ‘그 영화 어때’를 준비해서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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