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왜 혁명을 완성하지 못했나···변화는 ‘고요한 대화’에서 시작된다[책과 삶]

백승찬 기자 2026. 5. 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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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바꾼 위험한 생각의 출발점
역사 살피며 ‘숙의’ 중요성 강조
소셜미디어·혁명 관계엔 회의적
“머리 맞대고 논의하는 수고 대신
무조건 거부 태도와 감정만 남겨”
2011년 2월8일 이집트 카이로 도심의 타흐리르 광장에 수십만명의 민주화 시위대가 모여 있다. 경찰에 맞아 죽은 청년 칼리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는 이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연합뉴스

혁명을 준비하는 시간

갈 베커만 지음 | 손성화 옮김

어크로스 | 496쪽 | 2만5000원

혁명은 어디서 잉태되는가. 광장의 ‘팔뚝질’인가, 정치범이 갇힌 감옥을 습격한 민중의 쇠스랑인가. 아니면 17세기 프랑스 노인의 편지, 신문의 독자 투고란, 가위와 딱풀로 만든 소녀들의 잡지인가. 갈 베커만은 말한다. “변화는 서서히 시작된다. 사람들은 다짜고짜 왕의 목을 베지 않는다.”

미디어 연구자이자 뉴욕타임스 북 리뷰 편집자, 애틀랜틱 도서 담당 수석 에디터를 역임한 저자는 ‘세상을 바꿀 위험한 생각’이 나타나는 과정을 살핀다. 핵심은 미디어를 통해 조심스럽게 전파된 소수의 농익은 생각과 고요한 대화다. 한국어판 제목은 좀 더 직설적으로 읽히지만, 원서 제목은 ‘The Quiet Before’(그 이전의 적막)다.

니콜라클로드 파브리 드 페이레스크(1580~1637)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부유하면서 열정적인 자연철학자였던 그는 생전 단 한 권의 책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은 ‘편지’였다. 우편이 신속해지고 상대적으로 믿을 만했던 시대, 페이레스크는 지중해 전역의 아마추어 관찰자 수십명을 섭외하고 설득하고 교육해 한날한시에 월식을 관찰하게 했다. 몇달에 걸쳐 모은 관찰값으로 그는 잘못 알려졌던 지중해의 크기를 새로 계산했다.

시대가 흐르며 미디어는 달라졌다. 편지가 “천천히 진행되는 사고 활동이 흘러가는 파이프”였다면, 청원서는 수많은 사람의 좌절감이 압축된 공동 창작물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퍼거스 오코너(1796~1855)는 직물공, 광부, 방직공, 선술집 주인 등 128만여명의 이름이 담긴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청원서에는 보통선거권을 달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오코너는 시위 현장의 폭발성 대신, 서명을 모으는 과정의 엄숙함, 친밀함, 교육적 가치를 믿었다. 수차례의 청원 운동은 결국 선거권 쟁취로 이어졌다.

영국인들은 스스로 ‘선량한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식민지였던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에 언론 자유를 허용했던 이유다. 영국인들이 신문은 ‘격변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국 유학파 아프리카인들은 1930년대 초부터 고국에 돌아와 신문을 창간했다. 이 지면에서 아프리카 식민지인들의 자의식이 깨어났다. 많은 기자를 채용할 예산이 없던 신문들은 여러 지면을 독자 기고로 채웠고, 지면은 곧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이 됐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미국의 소녀들은 조악한 잡지를 발행했다. 하긴 ‘조악하다’는 건 기성세대의 평가다. 소녀들은 펑크 문화의 자유, 반권위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내재한 과도한 남성성은 거부했다. 엄마 세대가 신봉한 ‘향냄새 나는 페미니즘’엔 끌리지 않았다. 대학 여성학 수업에서 ‘여자애’(girl)라는 말을 ‘여성들’(woman)이라고 바로잡는 교수에게 짜증을 느꼈다. 소녀들은 뜬구름 잡는 이론 대신 성폭행, 섭식장애 같은 소재를 직설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잡지에 담았다. 방에서 DIY로 잡지를 만들고 의회 도서관 복사기로 복사한 뒤 자신들의 펑크 공연장에서 배포했다. ‘분노한 소녀들’이 만든 출판물이자 반(反)출판물인 이 잡지들은 1993년 미국에서 수천개에 달했다.

인터넷은 모든 걸 바꾸었다. 어쩌면 이 책 전반부가 다룬 17세기 초반~1990년대보다 후반부에서 다룬 인터넷 도입 이후에 더 많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소셜미디어는 혁명을 일으킬 수 있나’로 요약될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적이다. 2010년 이집트 경찰에게 맞아 죽은 젊은 프로그래머 칼리드 사이드를 기리기 위해 개설된 페이스북 페이지는 명백히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군이 다시 개입하며 짧게 끝난 ‘아랍의 봄’은 격렬한 시위가 얼마나 쉽게 흐지부지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페이스북은 “선언을 편애”했고 “눈물에 제격”이었지만, 그람시가 말한 ‘역사 블록’을 형성하진 못했다. 역사 블록이란 국가권력 장악에 필요한 첫 단계로, “공유된 이념에 뿌리를 둔, 동맹과 관계를 중심으로 조율된 연결망”이다. 페이스북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의제를 논의하는 수고” 대신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와 감정”만을 남겼다. 이곳에서 ‘좋아요’라는 화폐는 “피를 가장 많이 흘린” 발언에 대한 보상으로 돌아갔다. 페이스북은 “의도는 고결하지만 집중력이 짧은 십대 남자 친구들 같았다”.

2020년대의 활동가들은 ‘지속 가능성’에 눈을 돌렸다. 미국 마이애미의 활동가 단체 드림 디펜더스는 트위터 팔로어 수를 기준으로 영향력을 측정하는 세간의 방식에 반발해, ‘블랙아웃’이라는 계획을 실행했다. 이 조직 사람들은 휴대전화에서 소셜미디어 앱을 일정 기간 지웠다. 트위터는 “요령껏 써먹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리더로 치켜세웠지만, 이들은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는 왕”일 뿐이었다. 조지프 나이는 국가의 영향력을 “논쟁과 이야기를 통해 문화를 형성하는 힘”인 소프트파워와 군사력과 경제력을 중심으로 하는 하드파워로 분류했다. 소셜미디어는 하드파워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드림 디펜더스는 조용히 오프라인으로 나아가 지역사회 주민들의 고민을 경청하고 입법에 힘썼다.

저자는 “저항의 씨앗을 뿌리는 방법”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참정권을 위한 청원서든, 현대의 유권자 운동이든, ‘외침’이 아니라 ‘숙의’가 변화의 핵심이다. 인터넷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터넷은 스위스 군용칼처럼 만능이 아니라, 망치처럼 특정한 용도로 사용되는 도구라는 뜻이다. 진짜 혁명은 열기에 찬 광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조용한 제안에서 시작해, 지난한 숙의로 마무리된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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