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만의 개헌, 협의 없이 추진하는 與

노석조 기자 2026. 5. 8.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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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힘 반대에도 본회의 표결 강행
野 “졸속 안돼” 수차례 밝혔는데
선거 20여일 앞두고 처리 나서
투표 무산되자 “계엄 두둔” 공격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7일 본회의장 내 국민의힘 의원석(사진 앞쪽)이 텅 비어 있다. 국민의힘이 불참하면서 개헌안 처리는 무산됐지만, 우원식 국회의장과 민주당은 “의결정족수 부족에 따른 투표 불성립”이라 일사부재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8일 본회의에서 개헌안을 다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김지호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헌법 개정안이 7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국민의힘이 불참해 처리가 무산됐다. 본회의에 상정된 안건이 부결되면 같은 회기에 다시 상정할 수 없지만 우원식 국회의장과 민주당은 “의결정족수 부족에 따른 투표 불성립”이라며 8일 본회의에서 개헌안을 다시 처리할 계획이다. 국민의힘은 개헌 추진 초기부터 “내용은 반대하지 않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졸속 개헌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왔다. 정치권에선 집권 여당이 1987년 이후 39년만에 개헌을 추진하면서 제1 야당과 합의 없이 밀어붙이다 벌어진 ‘예고된 파행’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는 이날 민주당 등 의원 187명이 지난달 3일 발의한 개헌안을 상정했다. 헌법 전문에 부마 민주 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수록하고, 대통령 계엄 선포 때 즉시 국회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계엄 요건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표결에 불참해 의결정족수(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인 191명을 채우지 못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사전 합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당론으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우원식 국회의장과 민주당이 강행 상정했다”고 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5회 국회(임시회) 제1차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뉴스1

처리가 무산된 후 청와대 강유정 수석대변인은 “투표 불성립에 안타까움과 유감을 전한다”며 “국민의힘 의원들은 헌법기관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투표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이 표결 불참한다면 불법 비상 계엄을 두둔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6·3 지방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내란 심판 프레임’으로 야당 압박전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민주당은 8일 본회의에서 개헌안 투표가 무산될 경우, 9일과 10일에 다시 처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여권은 6·3 지방선거 때 개헌안 국민투표를 하기 위해선 늦어도 10일까지 개헌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국민의힘은 여당의 재투표 예고에 본회의에 상정되는 모든 안건에 대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할 계획이다.

◇‘공소 취소’ 코너 몰린 與, 개헌 표결 계속하며 ‘野 내란세력’ 낙인

더불어민주당이 7일 국민의힘 반대에도 개헌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 자체가 무산되자 정치권에서는 “성사가 안 될 줄 알면서도 야당 압박용으로 밀어붙인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부마항쟁과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계엄 요건 강화 등 개헌 내용에 국민의힘이 그간 재차 공감을 표했는데도 여당이 협의 절차를 건너뛰고 개헌안 처리 시점을 6·3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 졸속 추진했다는 것이다. 헌법학계에선 “헌정 질서의 근간인 헌법 개정을 제1 야당과 합의도 없이 계속 추진하는 것은 역사적 오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국민의힘은 국회 본회의에 개헌안이 상정되자 표결에 불참하고 본회의장 맞은편에 위치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장에서 의원총회를 열었다. 국민의힘 의원 전원 명의의 성명에서 “법치주의를 유린하는 세력이 다수의 힘을 앞세워 자신들 입맛에 맞는 헌법 개정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이자, 주권자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이날 6월 시작되는 22대 국회 후반기에 헌법 전문부터 권력 구조까지 담긴 포괄적 개헌안을 논의하자고 거듭 제안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수석대변인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장동혁 대표와 송언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을 대표해 개헌과 관련한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권에선 민주당이 이재명 대통령 사건을 공소 취소할 수 있는 ‘조작기소’ 특검을 추진했다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나빠지자 개헌 이슈를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본회의 전 청와대 앞에서 연 현장 최고위원 회의에서 “이번 개헌으로 길을 닦고, ‘장기 독재’ 개헌으로 끝까지 가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종배 의원은 페이스북에 “공소취소 특검법 추진하는 민주당은 헌법 개정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민주당은 표결에 불참한 야당을 맹비난했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은 내란과 극우 선동에 대한 진정한 사죄는커녕 윤어게인 공천에만 혈안이 돼 있다”며 “개헌이라는 역사와 시대의 책임을 회피한다면 국민의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현정 의원은 “민주당은 기명 투표로 국민의힘 만행을 역사에 박제하겠다”고 했다. 추미애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도 이날 페이스북에 입장을 내고 “국민의힘은 여전히 시대의 명령을 거슬러 윤석열 내란수괴와 함께 망상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며 “이번 지방선거는 내란을 종식시켜야 하는 선거”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한병도 원내대표가 7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에서 대한민국헌법 개정안 표결에 참여하기 위해 대기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39년 만에 찾아온 개헌의 기회가 선거를 앞두고 정략 도구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야 합의로 최고법인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번에 그것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개헌안에선 이 같은 합의 정신이 발의 단계에서부터 훼손됐고,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거치지 않았다”며 “39년 만의 헌법 개정인데 권력 구조 개편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이 반영되지 않은 점도 문제”라고 했다. 전직 헌법연구관은 “개헌 논의 과정에서 여권이 야당을 비방하는 정치 공세를 편 것도 부적절했다”고 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이 본회의 하루 전인 지난 6일 국무회의에서 “(개헌에) 반대하는 사람은 불법 계엄 옹호론자라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에서 “혹자는 개헌을 가장 싫어하는 세력이 ‘윤어게인’ 아니냐고 반문하고, 국민의힘 지도부가 윤어게인에 묶여 있다는 지적도 있다”고 밝혔다.

정치권 관계자는 “2018년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이 당시 여당 주도로 강행 추진돼 본회의 표결 불성립이 되며 개헌 역사에 오점이 남았다”면서 “여당이 의석수를 앞세워 각종 법안을 강행 처리하면서 야당에 개헌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개헌에 진심이라면, 본인이 책임지고 개헌안을 제안하고 국민의힘을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지 않으냐”고 했다.

민주당은 8일 본회의를 열어 개헌안을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오는 10일 본회의 때까지 표결 처리가 되지 않으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개헌안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는 사실상 실시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투표 불성립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의결 정족수가 미달돼 투표 자체가 성립하지 않은 경우를 뜻한다. 개표도 이뤄지지 않는다. 부결과 달리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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