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이런 걸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2026. 5. 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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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찰스 3세가 말한 ‘견제와 균형’의 원칙
한국에선 폭주하는 의회 권력이 허물어
행정부는 거기 올라타고 사법부는 무력해
대통령 기소 사건 ‘공소 취소’로 없앨 수도
사법부 장악한 정권을 끝장낸 헝가리처럼
비틀거리는 대한민국이 안길 곳은 국민뿐
일러스트=이철원

왕은 위엄이 있었다. 조각나고 거친 소리로 가득한 세상에 완벽한 문장과 조용한 무게로 역사와 정치와 가치를 전파하고 외교의 극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미국을 국빈 방문한 영국의 찰스 왕 이야기다. 진짜 ‘왕’인 그는 대통령의 ‘왕 행세’를 비난하는 ‘왕은 그만(No King)’ 시위가 벌어지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한복판에서, 250년 전 영국의 ‘명분 있는 반란자(찰스 왕의 표현)’들이 건설한 신대륙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을 이야기하고 12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영국식 유머는 미국이 따라오기 힘든 영역이다. 유머가 없는 연설은 범죄라는 영국 통념에 따라 왕은 “우리가 아니었으면 지금 미국인들은 불어를 쓰고 있을 것”이라고 조크했다. 이란 전쟁으로 신경전 와중이던 미국에 온 영국의 왕은 9·11 당시 NATO가 지원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 군인도 함께 싸웠으며, 우크라이나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등의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 외교란 그런 것이다. 이날 영국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왕이 자랑스럽다고 논평했다. 반면 미국의 비평가들은 영국의 왕이 미국에 와서 민주주의 원칙을 가르치다니, 250년 전 건국의 아버지들이 상상도 못 했을 장면이라고 혀를 찼다.

왕(찰스 3세)이 말했듯, 과거 왕(찰스 1세)을 처형한 전력이 있는 영국의 의회는 아직도 개원식 때 여당 원내대표 격인 부시종장을 감금하는 의례적 전통을 따른다. 미국은 그런 절대 권력이 없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며 ‘왕’ 대신 ‘대통령’이 통치하는 제도를 만들고 입법·사법·행정이 상호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권리장전과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250년이 지난 지금, 영국 왕이 미국 의회 연설에서 마그나카르타(대헌장)와 견제와 균형의 문제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메시지다. 아무리 우아하고 낮은 톤으로 이야기해도 그건, 영국 평론가들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이 원래 어떤 나라였는지 아느냐는 무서운 역사적 경구(警句)라는 것이다.

28일(현지시각) 미국 국빈 방문 중인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미국 워싱턴 DC 연방 의회 의사당에서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 전 미 의원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후 찰스 국왕과 카밀라 왕비는 백악관 사우스 포티코의 발코니에서 열린 환영 열병식을 관람했다. /X, 백악관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이 얼마나 어려운지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선출된 권력이 모든 권력 위에 군림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갈수록 균형이 아니라 권력 간 서열이 오히려 더 공고해져 가는 듯하다. 폭주하는 의회 권력과 그에 올라탄 행정부, 그리고 무력한 사법부가 한국형 삼권분립의 현주소다. 의회의 권력을 막을 힘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아마 역사가가 근래의 대한민국을 기술한다면 ‘견제와 균형을 상실한 권력의 시대’쯤으로 기술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그 의회가 또 하나의 일을 벌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윤석열 정권 조작 기소 특검법’이 그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변호인을 지낸 이건태 의원 등 31명이 발의한 이 법은 특검에 공소를 취소할 권한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고, 대상 사건 12건 중 대통령 관련 사건이 8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특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모양만 봐도 이해충돌 소지가 다분한 이 법에 대해 여당은 조작 기소를 기정사실화하며 대통령도 법 앞에 평등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고, 야당들은 ‘이재명 셀프 면제 추진법’(국민의힘) ‘사법 내란’ ‘형사 사법의 주춧돌을 빼는 일’(개혁신당) ‘공소 취소 길 내는 조작 기소 특별법 반대 성명’(정의당)으로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선거가 목전에 다가오자 구체적 시기와 절차 논의는 선거 후로 미루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내용이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대통령이 자기 사건의 기소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드는 초유의 일이 마침내 벌어질지 모른다.

이번 법안뿐 아니라 사실 그 의회는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온갖 일을 밀어붙였고, 번번이 성공해 왔다. 윤석열 정부 때는 줄탄핵으로 국정을 마비시키고 예산을 잘랐으며, 법사위원장을 야당이 맡던 관례도 무너뜨리며 의회 권력의 틈을 내주지 않았다. 지난 정부 때 이미 권력 간 균형은 무너져 있었다. 그걸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겨우 견제를 해 왔는데 계엄이라는 악수를 두면서 그조차 불가능해졌다. 지금의 야당은 균형은커녕 견제도 못하는 약체가 되어버렸다.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와 유정복 인천시장 후보, 개혁신당 조응천 경기도지사 후보가 2026년 5월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 조작 수사·기소 의혹 특검법안'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회동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250년 동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대통령제를 유지해 온 민주주의 선진국 미국에서도 견제와 균형이 위협받는다면, 그건 진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에게 견제와 균형의 경험 자체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늘 싹쓸이 정치만 해온 우리는 권력을 뺏고 빼앗기고 휘두를 줄만 알았지 타협하고 나누고 서로 균형을 맞추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몰염치한 행태를 보이는 지금 정치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들 또한 해본 적도, 보고 배운 적도 없으니 무엇을 기대할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나라를 이끌어 온 건 언제나 국민이었다. 막나가는 권력을 두고 ‘연성 파시즘’이니 ‘민주 독재’ 같은 말을 하는 호사가도 있지만, 세계 10위권 민주 국가에 사는 국민의 자존심으로 나는 그런 독한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민주 선진국도 어려운 ‘견제와 균형’을 이제 막 학습하려는 단계라고 봐주고 싶다. 그리고 당장은 균형이 없어 보여도 통시적으로는 늘 국민이 균형을 잡아왔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16년 동안 의회와 사법부를 장악하고 집권 세력을 위한 ‘행정법원’을 따로 설립하는 등 권위주의 행태를 일삼던 빅토르 오르반 체제를 국민의 힘으로 종식시키고 마침내 자유민주주의 회복의 대장정에 오른 헝가리처럼. 비틀거리는 대한민국이 안길 곳은 오직 국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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