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운빨이라도 좀 있었으면

이영관 기자 2026. 5. 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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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없는 새벽, 가방을 메고 관악산에 올라간다. 젊은 애들이 몰려서 낮에는 도저히 등산할 수가 없다. 그놈의 운(運), 운, 운. 운을 산에 맡겨 놨나? 인생 참 쉽게 살려고 한다. 분노를 삭이며 마당바위에 도착한다. 가방에서 노란색 래커를 꺼낸다. 숨을 고르고 바위에 또박또박 글자를 쓴다. “너희에게 줄 관악산 운빨은 없다.” 만족한 듯 웃으며 하나 더 적는다. “메롱.”

지난달 관악산 마당바위에 노란색 래커로 쓰인 낙서. "너희에게 줄 관악산 운빨은 없다 메롱"이라고 적혀 있다. /스레드

최근 논란이 된 ‘관악산 낙서’가 만들어졌을 풍경을 상상해보면 이렇다. 관할 구청은 낙서를 지우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후로도 논란이 계속 커지는 모양새다. 한 유명 연예인은 낙서 범인을 향해 “래커로 그 사람 얼굴에 색칠해 주고 싶다”고 했고, 며칠 전엔 관악산 정상 부근 웅덩이에 라면 국물이 버려진 일과 엮여서 회자됐다. 일련의 사건으로 낮은 시민 의식 수준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다. 올 초 한 역술가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운이 안 풀리면 관악산에 가라”고 말한 게 발단. 관악산은 몇 달째 소원을 빌려는 2030으로 붐비고 있다. 많은 이에게 기운을 나눠주느라 정작 관악산은 지치고 몸살을 앓는 중이다.

다소 황당한 사건을 보며 2030이 느끼는 분노의 본질은 낙서 문구가 다큐라는 데에 있다. ‘운빨은 없다’는 말은 현실에 가깝다. 운이 없는 현실에서 티끌만 한 운이라도 기대했는데, 그마저도 조롱받은 것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2030을 ‘삼포 세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 세 가지만 포기했으면 다행이다. 취업, 내 집 마련, 인간관계까지. 성장이 정체되고 작은 과실마저 기성세대에게 집중되는 사회에서, 2030은 자연스레 많은 것을 포기하는 ‘N포 세대’가 됐다. 기댈 곳이 없기에 운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악산만이 아니다. 운은 2030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왔다. 휴대폰 앱으로 하루 운세를 확인하고, 지인·직장 동료 등 주변 사람과 궁합이 잘 맞는지 확인하는 이가 여럿이다. 일상 속 사소한 결정에 대한 일종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 변화 속도는 기존 역술가들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한 역술가는 인터뷰에서 “최근 강아지, 고양이 사주는 물론 덕질(취향을 파고드는 것)하는 아이돌과의 궁합을 보는 20대 손님이 늘고 있다”고 했다. 이유가 더 인상적이다. 연애하려고 궁합을 보나 싶었는데, 팬으로서 아이돌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운을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은 10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에서 김 첨지가 겪었듯, 갑작스러운 운은 불행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원 빌려고 산을 찾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런 생각을 구태여 말로 할 필요는 없다. 운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버티기 어려운 절벽 앞에서 ‘운빨’을 바라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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