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의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하은정 기자 2026. 5. 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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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동네 노점상은 할머니들의 셀프 돌봄 센터

벚꽃이 다 떨어지고 5월이 한창인데 집 앞 노점상은 종무소식이다. 길가에 각종 제철 채소를 늘어놓고 팔던 노부부가 계속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 할아버지 트럭에 채소를 싣고 와서 팔다가 해가 설핏하면 사이좋게 정리해서 퇴근하던 분들이다.

김장철에 각종 재료를 잔뜩 늘어놓았길래 "요즘 장사가 잘되시겠네요"라고 아는 척을 했더니, 김장 대목도 다 옛말이라고 손사래를 치셨던 기억이 난다. 수지가 안 맞아서 닫으셨나? 할머니 다리가 좀 불편하던데 어디 편찮으신가? 혼자 사는 데다 요리 솜씨가 신통찮은 탓에 있으나 마나 한 손님이었던 주제에, 요즘 그 앞을 오갈 때마다 '오늘은 나오셨나?' 두리번거리곤 한다.

이곳이 구멍가게라면, 집에서 버스정류장 하나 떨어진 곳에 있는 노점상은 슈퍼마켓이라 부를 만하다. 골목 끝자락 공터에 붙어 있어 제법 규모가 큰데, 온갖 채소부터 과일까지 웬만한 건 다 있다. 이 노점상에는 늘 할머니 서너 분이 모여 쪽파를 다듬고 도라지를 까고 마늘 껍질을 벗기고 있다. 수다는 국룰. 손도 입도 쉬는 법이 없다. 일거리도 손님도 없는 때는 다 같이 믹스커피를 드시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푸근해진다.

사실 이곳은 동네 할머니들의 사교클럽이자 셀프 돌봄 센터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밤새 안녕한지 안부를 확인하고, 새로 입수한 온갖 동네 소식을 나누고, 자식들의 근황을 공유한다. 그곳의 단골손님인 친구에 의하면 며칠 문을 닫았다 열었길래 안부를 물었더니 할아버지, 그러니까 배우자가 돌아가셔서 초상을 치렀다고 하시더란다. "영감, 잘 갔지 뭐. 아픈데 오래 시들면 뭐 해." 무심하게 한 마디 덧붙이셨다고.

사진=ChatGPT 생성

오래된 연립주택의 불편함과 다정함

30년 넘게 주로 지하주차장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아파트에 살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작은 연립에 혼자 살기 시작한 지 2년째다. 여기는 4, 5층 연립이 모여 있는 오래된 동네로 아파트촌과는 사뭇 풍경이 다르다. 길에서 풍찬노숙 중인 내 차는 빠르게 수명을 단축당하고 있고, 어쩌다 대형마트 장보기라도 한 날은 짐을 몇 차례에 나누어 계단으로 들어 올리느라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는 생선가게, 신발가게, 떡집, 음식점 등 온갖 가게들이 촘촘하다.

신기한 건 세 집 건너 한 집이 미용실이라는 점이다. 이 동네 아줌마들은 헤어스타일에 목숨 걸었나? 오해는 마시길. 알고 보니 미용실은 아줌마들의 사랑방이었다. 미용실에서 밥만 해두면 여기저기서 반찬이 나타나 점심상이 차려지고 사람들이 모여든다니, 아직 '응답하라' 시리즈의 여운이 남아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파 한 단도 차를 타고 나가야 살 수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살던 나에게는 이 동네가 낯설고도 정겹다.

행복한 노년의 조건, 익숙한 곳에서 살기

일본의 한 연구에 따르면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오래 살던 곳에서 계속 거주하는 게 좋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이 들어 필요한 거주지는 비싸고 시설 좋은 넓은 집이 아니라 아는 이웃이 있는 익숙한 집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뒤늦게 고령의 부모를 모시고 와서 함께 살려는 자식의 효도는 어쩌면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살던 곳을 바꾸면 치매도 심해진다.

일본의 재택임종을 7년 동안 취재한 화제의 다큐 〈어쩌면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을 만든 고희영 감독은 60세가 되면 누구나 남은 생을 어디서 살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는 곳이 바로 그 사람의 말년의 삶과 나다운 죽음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가장 나다운 마침표'를 위해 그녀는 병원과 교통이라는 편리함 대신 고향 제주의 숲과 이웃이 있는 곳을 선택했다. 한국의 요양병원부터 해외의 각종 임종 현장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전문가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눈길이 간다.

60을 훌쩍 넘겼지만 나는 아직 남은 생을 어디서, 어떻게 살지 정하지 못하고 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어리바리 이대로 살다가는 준비 없는 노년의 삶에 끌려다닐까 걱정이다. 확실히 나이가 드니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단절된 고층 아파트보다는 이웃과 스킨십이 활발한 담장 낮은 동네에서 살고 싶기는 하다.

이 집에서 얼마나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수 적은 주인장의 핸드드립 카페와 금요일마다 현미 가래떡을 파는 할머니 떡집, 각종 채소와 과일을 무조건 5천 원 균일가에 파는 빨간 바구니 가게가 있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 동네가 가장 좋은 이유는 나를 챙겨주는 다정한 후배와 선배가 근처에 살기 때문이다. 역시 꽃보다 사람 아니겠는가.

이은숙 작가 얼마 전부터 공손한 자세로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한 60대. 30년 동안 여성지를 만들었고, 퇴직 후 무식해서 용감하게 어르신 학습지를 창업했다. 지금은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여전히 진로 고민 중이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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