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식물이 가르쳐 준 세상

기호일보 2026. 5. 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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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림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채효림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우리 집 베란다 창가는 늘 화분으로 가득했다. 화분을 돌보는 건 주로 아빠 몫이었다. 엄마도 간간이 물을 줬다. 나는 미닫이 유리문 너머 벌어지는 일들엔 흥미가 없었다. 어쩌다 꽃이 폈다고 일러주면 잠깐 신기해할 뿐이었다. 내 눈에는 다 똑같은 초록색, 비슷한 모양새들이었다.

자취하면서 습관이 하나 생겼다. 틈만 나면 당근마켓 판매창을 구경했다. 괜찮은 물건을 싼값에 얻는 재미 때문이다. 하루는 '연필 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가시도 없어 녹색 빼빼로처럼 생긴 게 선인장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하찮은 모습에 마음을 뺏겼다. 연필 선인장은 내 의지로 내 공간에 들인 첫 생명이 됐다.

이를 계기로 또 다른 초록 친구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선인장과 함께 본가에 돌아오고 내 방 베란다가 생기면서 화분은 우후죽순 불어났다. 동글동글 완두콩처럼 생겨 콩란이라고 불리는 녹영금, 동전처럼 둥글납작한 이파리의 필리아 페페, 진녹색 잎사귀에 반짝이는 은색 점박이 무늬가 새겨진 마큘라타까지. 식물 하나하나가 모두 고유한 모양새, 저마다의 색을 지니고 있다는 걸 그제야 눈으로 확인했다.

하루하루 틀린 그림 찾기의 연속이었다. 낮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오는 짧은 사이 새 잎을 틔워냈고 물에 꽂아둔 가지가 하얀 뿌리를 내렸다. 촉촉한 진갈색 흙이 고슬고슬 옅은 색으로 바뀌면 이파리를 축 늘어트렸다. 물을 주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며 생기를 되찾았다. 잎끝은 갈색으로 말라가기도 회색으로 물들기도 했다. 소리나 움직임 없이도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화분을 살피며 자연이 하는 일까지 다시 배웠다. 물을 주고 난 뒤에는 흙이 뭉쳐 단단해진다. 이때 그대로 두면 공기가 통하지 않아 뿌리가 숨을 못 쉰다. 흙 사이사이 공간이 생기도록 일회용 포크나 손가락으로 살살 뒤적여줘야 한다. 벌레와 지렁이가 고마운 존재라던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그제야 와닿았다.

보살핌은 내버려 둠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가만히 앉아 잎이나 흙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자꾸 흙을 뒤적거리고 싶어진다. 뿌리가 썩지는 않았는지 파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햇볕이 더 잘 드는 자리로 이리저리 옮기기도 한다. 잎이 나오는 속도가 더디면 기다리지 못하고 흠뻑 물을 주기도 했다. 흑색으로 썩어버린 줄기를 보며 사람이 그렇듯 이들에게도 타자의 개입 없이 혼자 성장할 시간이 필요함을 배웠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소설 「바깥은 여름」에서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심정을 묘사한 김애란 작가의 문장이 내게도 와닿았다. 화분 몇 개 돌보는 일을 아이를 길러내는 고됨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세상을 다시 배우는 일이었다.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온갖 종류의 화분을 건강하게 길러내는 사람들이 조용한 만큼 대단해 보였다. 작고 연약한 생명, 흙 밖을 벗어나지도 소리 내어 고통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존재를 돌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온기가 있다.

 "연필 선인장이 운이 좋아 효림 님께 갔나 봐요." 처음 화분을 거래하며 들었던 말 한마디, 차가운 날씨에 오느라 수고 많았다며 귤을 쥐어 주신 아주머니, 서비스라며 원추리 꽃씨를 함께 건네던 또래 여성분, 오랜 기간 공들여 꽃을 피워낸 기쁨을 나눠준 아빠까지. 어쩌면 사람들 덕분에 식물에 더 빠르게 애정을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몇 안 되는 베란다 귀퉁이의 화분들이라도 제대로 돌보며 그 묵묵한 다정함을 닮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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